1960년 ‘3·15 부정선거’ 지휘 혐의로 61년 박정희의 5·16 쿠데타 직후 체포된 최인규 내무장관이 그해 12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 집행 직전 최후진술을 하고 있다. 필자는 47년 8월 미국 유학길에 그와 배에서 만나 같은 선실을 쓰며 영어를 가르쳐준 인연이 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26
미국 가는 화객선을 타고 인천을 떠난 날이 1947년 8월 15일이었고, 그 배의 이름이 ‘제너럴 고든호’였다고 기억하는데, 그날 아침 집을 나서기 전 선친께서 식구를 모두 불러 모으시고 가족예배를 보시는 중 특히 고르셔서 같이 부르게 하신 찬송가가 149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었소이다. 그 찬송가 2절이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가 아니오이까. 나그네가 되어 먼 길을 가는 이삭의 아들 야곱이 들길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늘의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축복을 베풀어 주신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난 뒤 그 자리에 돌단을 쌓았다는 <창세기>의 설화가 그 내용이지요. 선친께서는 굳이 야곱의 고사를 식구들에게 해설하는 말씀을 안 하시더군요. 다들 아는 얘기였으니까요.
인천을 출항한 그 배에는 우리나라 승객이 기묘하게도 33명이었소이다. 아직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전인 군정청 시대였으니 청운의 뜻을 품고 미국으로 떠나는 그 33명이 제각기 3·1운동 때 민족을 대표했던 지사를 자처하고 있었노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었겠지요.
그때의 33명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뿔뿔이 헤어진 뒤 다들 어떤 인생길을 걷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되 나와 같은 선실에서 꼭 2주일을 같이 지내면서 태평양을 건넜던 최인규씨만은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소이다. 그는 군정청에서 무슨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분인데 영어실력을 키워보려고 미국행을 결심한 것 같았사외다. 그의 판단으로는 내 영어가 자기보다는 약간 위라고 느꼈던지 문법책을 들고 와서 이것저것 묻는 바람에 항해 동안 나는 그의 영어교사 노릇을 하게 됐소이다. 그가 누구냐구요? 60년 4·19를 불러일으킨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했다는 죄로,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제꺽 잡아다 사형에 처해버린 이승만 정권 말기의 내무부장관이 ‘최인규’ 아니오이까. 그러니까 그때 최인규, 그분이 청운의 뜻을 품고 미국으로 향했던 그 배는 영국 사우샘프턴을 떠나 뉴욕으로 가던 도중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타이태닉호였노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비행기 타고 여행하는 시대가 아닌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지아주 애틀랜타로 가려면 우선 대륙횡단 철도인 샌타페이 라인을 타고 닷새 걸려 시카고에 도착, 거기서 남하하는 기차로 갈아타고 이틀인가를 더 가는 머나먼 여행을 해야 했는데, 시카고를 떠난 남행열차가 메이슨-딕슨 라인(Mason-Dixon Line), 즉 흑백을 가리는 미국판 38선을 건너게 되자 차장이 와서 흑인 승객들을 깡그리 몰아 다른 칸으로 옮기라고 막 불호령을 내리더이다. 미국이 백인우월주의의 나라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나, 흑인들을 마치 동물과 같이 몰아내는 그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면서, 툭하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는 미국이란 나라의 또다른 면모가 강력한 인상으로 가슴에 다가오더이다.
아무튼 그 머나먼 여행 끝에 애틀랜타역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은 미국 헌법이 말하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은 백인만의 것이 아니라 흑인의 것이기도 하다는 주장을 걸고 흑인의 공민권운동을 하다가 암살당한,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나서 자란 곳이기도 하외다. 그 애틀랜타시 에머리대학에서 가을학기부터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오다.
돌이켜보면, 그냥 집에 머물러 있었으면 평범하나마 의사로서 순탄한 한세상을 지낼 수가 있었을 터인데 미국으로 온 탓에 겪지 않아도 될 많은 일을 겪고, 알지 않아도 될 많은 일을 알게 됐소이다. 그 결과 미국 정부로부터 ‘기피인물’(persona nongrata)이라는 낙인이 찍혀, 해방 후 한국인으로서는 제일 먼저 미국 땅을 밟은 유학생이면서도 6·25 전쟁 때 미국을 떠난 뒤 두번 다시 그 땅을 밟을 수가 없었을뿐더러 내 나라로부터도 불온분자라는 딱지가 붙어 오늘까지 40년이나 남의 나라에서 망명객으로 한평생을 살았으니, 그때 나를 태우고 인천항을 떠났던 그 배는 내게도 역시 대서양을 건너다 가라앉은 난파선 타이태닉호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 자신은 그것이 반드시 타이태닉호는 아니었노라고 믿으면서 살아온 것이 사실이외다. 만일 골고다에서 받은 예수의 고통이 하늘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크나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걸어온 가시밭길은 오히려 나를 택해서 베풀어 주신 축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는 까닭이외다.
미국으로 떠나던 날 선친께서 골라 부르게 하신 ‘찬송가 149장’을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되새길 수밖에 없는데 오늘까지의 가시밭 나그넷길이 험하고 고된 길이기는 하였으되 오히려 감사하면서 베고 자던 돌베개 자리에 돌단을 쌓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오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