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남한 단독의 5·10 선거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이승만 박사가 부인 프란체스카와 이화장의 정원에서 당시 미국 잡지 <라이프>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필자는 유학 시절 이 대통령 부부의 각별한 지원을 받았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27
1947년 8월 미국 유학을 올 때까지는 의사가 되겠다는 의지가 분명했기 때문에 에머리대학에서도 전공은 자연과학계의 화학이었소이다. 그 시절 예컨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산소를 흡수하는 동물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적혈구)과, 반대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는 식물 잎새 속의 클로로필(엽록소)은 그 분자의 화학구조가 놀라울 만큼 흡사하며, 다른 점은 오로지 분자의 핵이 적혈구에서는 철(Fe)인 데 비해 엽록소에서는 마그네슘(Mg)이라는 점뿐이라는 사실을 배우면서 생명체의 신비에 놀라움을 느꼈던 것은 지금도 생생하오이다. 또 동물이나 식물이나 생물체의 단백질을 구성하는 가장 단순한 화학구조의 아미노산은 류신(leucine)이라는 물질인데 이것을 편광계(偏光計)에 걸면 편광의 방향은 언제나 좌편이며 우편이라는 예외는 없다는 것도 내게는 놀라울 뿐이었소이다. 분자의 입체구조에 따라서는 의당 편광의 방향이 우편일 수도 있는데, 생물체 내의 류신은 예외 없이 좌편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한 것은 까마득한 40억년 전이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생명의 ‘창조’ 내지 ‘발생’은 단 한 번뿐이었다고 추측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며, 또 그때 나타난 생물은 식물과 동물의 공통된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생명체였을 터인데 도대체 그것은 어떠한 화학구조의 생물이었을까? ‘왓슨-클릭’ 연구팀에 의해 유전자(DNA)의 이중나선 모델이 제시된 것은 1953년이니, 47년 당시 에머리대에서 내가 파고들었던 생명과학이란 유치원생의 소꿉장난처럼 초보적인 것이었으나, 그래도 그때 받은 자연과학의 훈련이 문장을 쓰는 데 필요한 논리적 사고의 기초가 된 것이 아닐까 스스로 느낄 때가 있소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발간된 바로 그해 1776년에 미국이란 나라가 창건됐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도 그 시절이었소이다.
개신교인(프로테스탄트)들의 근검질소한 생활윤리가 서유럽에서 자본주의를 낳기에 이르렀다는 막스 베버의 주장을 접하면서 사회과학에서의 논리 구성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구나 깨달은 바가 많았소이다. 먼 훗날 좌우합작을 모색했던 몽양 선생의 삶의 궤적을 나 자신이 밟아가면서 베버가 ‘시민적 자유를 통한 국민화’를 모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살았던 독일 11월혁명 때의 시대환경을 곰곰 생각한 일도 있었소이다. 당시 귀족적인 우파는 ‘시민적 자유’에 냉담했고, 한편 계급주의에 매달린 사회민주당적 좌파는 ‘국민화’에 냉담하지 않았소이까. 그러니까 베버도 역시 ‘좌우합작 운동’을 했다고도 말할 수 있으며, 그때 약간이나마 접할 수 있었던 베버는 사상적으로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오이다.
여기쯤에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인연을 말해야 되겠는데, 에머리대에서 2학기째로 들어갈 무렵 결핵이 발병해 요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소이다. 돈을 아껴 쓰느라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까닭임은 분명했는데 학교에서 마련해 준 거의 무료인 요양원에서 1년 가까이 보내고 학교로 돌아와 보니 집을 나설 때 선친께서 손에 쥐여주신 돈 1000달러는 거의 바닥이 나지 않았겠소이까. 학교에 등록은 했으나 등록금은 체납이었고 참으로 앞이 캄캄하더이다. 그때가 48년 대한민국이 창건되고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는데, 염치 불고하고 이 대통령께 편지를 쓴 것이오이다. 정성을 다해 내가 지금 미국에서 학비가 떨어져 곤경에 처해 있으니 도와주십사고요. 물론 영어로 쓴 편지였소이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니 학교 당국에서 불러 300달러를 건네줍디다. 당시로는 꽤 큰 돈이었는데 경무대에서 선친을 불러 공정환율로 송금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준 덕분이었소이다. 그 후 다시 한번 300달러가 오고 다음부터는 이 대통령의 알선으로 시카고에 본부를 둔 재단으로부터 육영자금을 받게 되어 학비 걱정 없이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까지 진학을 했으니 이것이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었겠소이까. 하늘이 도왔다는 말은 진정 나를 두고 한 말이었고, 내가 근황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면 또박또박 프란체스카 부인으로부터 답장이 왔소이다. 졸업식 때에는 축하 선물로 넥타이도 보내주셨구요.
그래서 얘기가 커다랗게 한 바퀴 돌아, 그러니까 이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따라, 주미대사 장면 박사의 전화를 받고 학업을 중단한 채 맥아더사령부 근무를 위해 도쿄로 떠나게 된 50년 10월로 되돌아온 셈인데, 나를 태운 미군 수송기가 일본 땅으로 가까워짐에 따라 내 가슴은 착잡해질 수밖에요. 그곳은 5년 전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겨놓고 작별한 여인이 있는 곳이 아니오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 |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