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태운 미군 수송기가 급유를 위해 잠시 웨이크섬에 머문 뒤 도쿄에 도착한 것이 1950년 10월 하순께, 미군 사령부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뒤 히요시의 옛 하숙집을 찾아간 것은 11월 초순이었사외다.
서울에 있을 때나 미국 유학 때나 치요코와의 문통은 그런대로 끊이지 않고 있었소이다. 그러나 여객기가 하루에도 몇십기씩이나 날아 태평양을 넘나들고 있는 지금이라면 모르되 그때 상황에서 ‘기다리라, 꼭 돌아오마’라는 약속의 말은 지킬수 있는 형편이 아니지 않소이까.
지금은 결혼 적령기가 따로 없는 셈이지만, 내가 미국에서 대학원으로 진학했을 때 스물여섯 살이었으니, 동갑인 치요코로서는 그 시절의 적령기가 이미 지난 셈이 아니오이까. 그래서 나는 나대로 스스로 자제하면서 편지를 쓸 때마다 적당한 사람이 나서면 옛일은 잊고 결혼을 하라고 은근히 권유하는 말을 하지 않았겠소이까.
그런데 갑작스럽게 6·25전쟁이 터지고 내가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으니, 수송기가 착륙을 하려고 일본 상공에서 선회를 하는 그 순간 내 가슴이 얼마나 착잡했겠소이까.
11월 초순 피에스(PX)에 가서 비누, 화장품, 초콜릿 등등 손에 잡히는 대로 사서 가방에다 잔뜩 집어넣고, 해질 무렵 그 옛집 문으로 들어섰소이다. 마당의 잔디밭은 파엎어져서 채소밭이 되었고, 늦가을 누렇게 시든 호박넝쿨이 을씨년스럽게 흐트러져 있었으나, 다감했던 소년시절을 보낸 그 집은 옛 모습 그대로 거기 있었사외다. 현관에 서서 약간은 조심스럽게 돌아왔다는 소리를 내니 금방 내 목소리를 알아차린 모녀가 깜짝 놀라 종종걸음으로 나오지 않소이까. 모녀는 놀라긴 했으되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맞아 묻지도 않고 저녁식사 준비를 했고 옛날처럼 셋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소이다. 과연 나를 기다리고 있느라고 그랬는지 아닌지 쑥스러워 물어볼 형편도 아니었으나 치요코는 시집을 안 간 채였고, 그때 요코하마 미군부대에서 타이피스트로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있었사외다. 치요코의 아버님은 연전에 별세하셨더이다.
그날 밤도 내가 쓰던 방에서 잤는데 이부자리도 떠나기 전 덮고 자던 그 이불, 그 요였사외다. 이 얘기를 소설로 엮었다면 하도 우연이 연속적으로 겹쳐서 서푼짜리 싸구려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았겠소이까. 천생연분이란 것이 있다면 ‘나와 치요코’ 사이가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소이다.
도쿄 시내에는 물론 사령부가 마련해 준 숙소가 있었으나 주말이 되면 마치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그 댁 아들 모양으로 히요시의 집에서 지내고는 했으니, 그 동네 이웃 사람들은 결혼식은 언제일까 당연히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겠소이까.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기에 무엇을 사줄까고 치요코에게 물어봤더니, 그게 그렇게 신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굽 높은 하이힐 말이외다. 도쿄 긴자(은좌)에서 가장 화려한 구두상점에 가서 자기가 골라 이것이라고 지정하기에 값을 치르고 나왔는데, 값이 치요코가 받고 있는 월급보다 많더군요. 그 월급이 그때 돈으로 1만엔쯤이었는데 내가 사령부에서 받는 월급은 그보다 열 배가 훨씬 넘는 금액이었지요. 감히 생각도 못하고 있던 그 신을 사 가지고 긴자 거리를 거닐 때, 선물을 손에 쥔 치요코는 물론이고 나 자신이 얼마나 흐뭇하고 행복한 심경이었겠소이까. 서울에 있는 가족들은 ‘1·4 후퇴’의 비극이 코앞에 닥쳐오고 있는 긴박한 상태였지만 말이외다.
아무튼 얼마 뒤 문익환 목사를 만나 결혼식 주례를 서주십사고 부탁을 드렸소이다. 문 목사는 내 경력을 소상하게 알고 계신 처지이니만치 한마디만 물으십디다. ‘자네가 에머리대학을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 대통령 덕분이었는데 일본에 오자마자 결혼을 했다면 오다가다 만난 뜬 여성일 거라고 오해를 받기가 십상이고, 더구나 결혼 상대가 일본 여자라면 이 대통령과의 인연은 끊어질 텐데 그래도 괜찮은가?’
나는 미리 대답 같은 것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불쑥 말이 나옵디다. ‘이혼녀라는 이유로 의회의 보수파가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을 반대하자 흔쾌히 대영제국의 왕관을 포기한 에드워드 8세 같은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각오한 바입니다.’
문 목사는 ‘그럼 됐어’ 하시고 주례를 승낙해 주셨소이다. 그래서 풋사랑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나와 치요코는 51년 7월 도쿄 시내의 작은 교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이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