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8월 8일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난 도쿄 그랜드팰리스호텔의 외관(왼쪽)과 내부 현장 모습(오른쪽). 당시 일본 신문에 보도된 사진이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55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1972년 10월 17일이었고, 그 낌새를 알아차린 김대중 선생께서 위험을 피하여 일본으로 떠나온 것이 그 1주일쯤 전인 10월 11일이었다는 것은 앞서 글에서 말한 바와 같으나,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국회의원 여권이 무효가 되니 김 선생께서 한때 퍽 난처한 처지에 놓였던 것은 사실이외다. 다행히 국제적십자사가 특별여권을 발행해 주어 그것으로 이듬해 미국으로 떠나셨는데 나하고는 연락이 끊어져 떠나신 날짜는 기억에 없지만, 미국 각처를 순회하는 활동을 개시하셨다는 것은 소문으로 알고 있었소이다.
그러던 어느날, 정확히는 73년 7월 10일, 야스에 편집장으로부터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어요. ‘자기와 김 선생의 대담을 <세카이> 9월호에 실을 예정인데 시간이 촉박하다, 오늘 저녁 몇시 도착 비행기로 김 선생께서 일본으로 돌아오실 예정이니 공항까지 마중을 나가 되도록 속히 자기에게 연락을 취해주십사고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이었소이다. 그런 일이라면 내가 나설 것이 아니라 수석비서관 조활준씨가 할 일이 아닌가 하면서도 그런 속사정을 야스에에게 말할 수도 없고 해서 하네다공항으로 나가 비행기에서 막 내린 김 선생께 부탁받은 전갈을 전했소이다. 그때 왜 그랬는지 마중나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소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김 선생은 7월 6일 워싱턴 메이플라워호텔에서 임창영, 안병국, 정기열씨 등을 주요 성원으로 하는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미국본부’의 결성을 마치고, 같은 조직의 일본본부를 결성하기 위해 도쿄로 돌아왔던 것이외다. 야스에의 전갈을 들은 김 선생은 알았다고 하면서 간다는 인사말도 없이 혼자서 택시를 타고 휑하니 어둠 속으로 사라지더군요. 김 선생이 어디로 갔는지 그때는 전혀 알 까닭도 없었으나, 후에 들은 얘기를 종합해서 추측해 보니, 그가 간 곳은 우에노에 있는 다카라호텔이었고, 그곳에서는 나중에 한민통 일본본부를 구성하게 되는 배동호, 곽동의, 조활준, 김종충, 정재준, 김재화씨 등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소이다. 그리고 그때 그곳에서 조직의 부의장으로 김재화·정재준씨가 추대되었고, 곽동의 조직국장, 김종충 국제국장, 조활준 사무총장, 배동호 상임고문 등으로 결정되었던 것이었소. 정 부의장은 원래 도쿄 민단본부의 부장으로 있었고, 김 부의장은 곽 국장의 장인인데, 이 중에서 상임고문 배씨의 위치는 퍽 특이한 것이었소이다. 나와 처음 만났던 사람이 배씨였고, 김 선생의 영입을 구상하고 실행한 사람도 그였을 것이라는 점으로 보아 조직의 핵심은 역시 배 고문이었으나, 실상에 있어 그 조직을 좌지우지하는 실력자는 의외로 곽 국장이었다는 사실은 차차 밝혀질 것이외다. 내가 아는 한 미국본부에는 무슨 무슨 국장이니 사무총장이니 하는 굉장뻑적지근한 직함 따위는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일본 조직의 구조는 이미 김 선생이 돌아오기 전에 짜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바이외다. 그러니 약간 가혹한 말이 되겠으나, 미리 그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김 선생은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 바이외다. 다카라호텔 회의가 끝난 뒤의 김 선생 거취는 알 길이 없으나, 일본으로 돌아온 당일부터 김 선생은 일본 공안과 한국 중앙정보부(KCIA), 그리고 정체불명의 탐정회사(밀리언 서비스) 등 삼중의 감시와 미행을 받게 된 것이니, 신변의 위험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었을 것 아니오이까. 나는 그때 조직의 기관지 <민족시보>를 내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 선생의 동향을 직접적으로 알 만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나, 한청 부위원장인 김군부씨를 대장으로 하는 경호대가 조직되어 거의 날마다 거처를 바꾸며 비밀리에 움직이는 김 선생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쯤은 물론 알고 있었소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러니까 8월 8일 사무소 근처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노라니, 김 선생이 시내 그랜드팰리스호텔에서 납치당해 모습이 사라졌다는 급보가 날아들었소이다. 점심을 먹다 말고 택시를 달려 헐레벌떡 납치현장인 그 호텔 22층으로 뛰어갔소이다. 그때가 오후 3시가 약간 넘은 시각이었는데, 현장에는 포르말린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었고, 막 도착한 일본 경찰들이 지문 채취 등 현장 수색을 시작하고 있었지만, 거기서 내가 서성거리고 있어 봐야 아무 소용도 없고 번뜩 번갯불같이 뇌리를 스쳐가는 무엇이 있어, 나는 급히 내려가 택시를 잡아타고 신주쿠에 있는 게이오플라자호텔로 달려갔소이다. 거기에는 미국에서 오신 임창영 선생이 묵고 계신 것을 알고 있던 까닭이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러던 어느날, 정확히는 73년 7월 10일, 야스에 편집장으로부터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어요. ‘자기와 김 선생의 대담을 <세카이> 9월호에 실을 예정인데 시간이 촉박하다, 오늘 저녁 몇시 도착 비행기로 김 선생께서 일본으로 돌아오실 예정이니 공항까지 마중을 나가 되도록 속히 자기에게 연락을 취해주십사고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이었소이다. 그런 일이라면 내가 나설 것이 아니라 수석비서관 조활준씨가 할 일이 아닌가 하면서도 그런 속사정을 야스에에게 말할 수도 없고 해서 하네다공항으로 나가 비행기에서 막 내린 김 선생께 부탁받은 전갈을 전했소이다. 그때 왜 그랬는지 마중나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소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김 선생은 7월 6일 워싱턴 메이플라워호텔에서 임창영, 안병국, 정기열씨 등을 주요 성원으로 하는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미국본부’의 결성을 마치고, 같은 조직의 일본본부를 결성하기 위해 도쿄로 돌아왔던 것이외다. 야스에의 전갈을 들은 김 선생은 알았다고 하면서 간다는 인사말도 없이 혼자서 택시를 타고 휑하니 어둠 속으로 사라지더군요. 김 선생이 어디로 갔는지 그때는 전혀 알 까닭도 없었으나, 후에 들은 얘기를 종합해서 추측해 보니, 그가 간 곳은 우에노에 있는 다카라호텔이었고, 그곳에서는 나중에 한민통 일본본부를 구성하게 되는 배동호, 곽동의, 조활준, 김종충, 정재준, 김재화씨 등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소이다. 그리고 그때 그곳에서 조직의 부의장으로 김재화·정재준씨가 추대되었고, 곽동의 조직국장, 김종충 국제국장, 조활준 사무총장, 배동호 상임고문 등으로 결정되었던 것이었소. 정 부의장은 원래 도쿄 민단본부의 부장으로 있었고, 김 부의장은 곽 국장의 장인인데, 이 중에서 상임고문 배씨의 위치는 퍽 특이한 것이었소이다. 나와 처음 만났던 사람이 배씨였고, 김 선생의 영입을 구상하고 실행한 사람도 그였을 것이라는 점으로 보아 조직의 핵심은 역시 배 고문이었으나, 실상에 있어 그 조직을 좌지우지하는 실력자는 의외로 곽 국장이었다는 사실은 차차 밝혀질 것이외다. 내가 아는 한 미국본부에는 무슨 무슨 국장이니 사무총장이니 하는 굉장뻑적지근한 직함 따위는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일본 조직의 구조는 이미 김 선생이 돌아오기 전에 짜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바이외다. 그러니 약간 가혹한 말이 되겠으나, 미리 그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김 선생은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는 바이외다. 다카라호텔 회의가 끝난 뒤의 김 선생 거취는 알 길이 없으나, 일본으로 돌아온 당일부터 김 선생은 일본 공안과 한국 중앙정보부(KCIA), 그리고 정체불명의 탐정회사(밀리언 서비스) 등 삼중의 감시와 미행을 받게 된 것이니, 신변의 위험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었을 것 아니오이까. 나는 그때 조직의 기관지 <민족시보>를 내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 선생의 동향을 직접적으로 알 만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나, 한청 부위원장인 김군부씨를 대장으로 하는 경호대가 조직되어 거의 날마다 거처를 바꾸며 비밀리에 움직이는 김 선생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다는 것쯤은 물론 알고 있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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