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2년 전인 2001년 미국 뉴욕에서 노후를 보내던 시절의 임창영 전 유엔대사와 부인 이보배씨.(왼쪽·<한겨레21> 자료사진) 1983년 무렵 주일 미국대사 출신인 라이샤워(맨 왼쪽) 교수와 그의 부인(맨 오른쪽)이 미국 체류중인 김대중·이희호 선생 부부와 함께했다. (사진 김대중도서관 제공)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57
1973년 8월 8일 김대중 선생이 납치당한 다음날 한민통 사무소는 인산인해. 도쿄 시내의 모든 언론사 기자들로 들끓고 있었소이다. 도대체 김대중은 누구이고, 한국 중앙정보부(KCIA)는 어떤 조직이며, 그 뒤의 박정희 정권은 어떤 정권인지를 물으러 온 사람들인데, 그때 피치 못하게 그 조직의 대변인 구실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많은 말을 하는 대신 산더미같이 쌓아놓은 <세카이> 9월호를 뿌렸는데, 그것으로 족했소이다. 내가 쓴 글에는 ‘박-김’ 대립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나 해방의 실체가 없는 한국과 민주화는 허상뿐인 일본이 맞물려 있는 현황의 역사적 배경이 거론되어 있으며, 더구나 김 선생과 야스에의 ‘대담’에서 김 선생 자신의 말로 설명한 박 정권의 실태는, 한국 중앙정보부가 무엇 때문에 백주 도쿄 바닥에서 그를 납치하는 범죄를 저질렀는지 웅변으로 밝혀놓은 셈이어서 기자들에게 충분한 해답이 된 것이외다.
<세카이> 9월호는 그날로 매진이었고, 다음날쯤부터는 어느 책점에 가나 ‘지금 증쇄중이니 기다려달라’는 벽보가 보이기 시작했소이다. 전무후무하게 그 9월호는 100만부 이상 팔렸다고 들었는데, 왜 하필이면 바로 그날 사건을 일으켰을까,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땅을 치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외다.
아무튼 김 선생의 생사를 모른 채 불안한 며칠을 보냈는데, 사건 닷새 만인 13일 밤,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범인들로부터 석방되어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얻어맞아 얼굴이 상처투성이기는 하나 살아있는 모습이 사진으로도 보도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는 있었소이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용금호에 실려 팔다리를 묶이고, 오른팔에 쇠뭉치가 달린 채 바다로 내던져지기 직전, 비행기인지 헬리콥터인지가 날아와 아슬아슬하게 살아났다는 김 선생의 증언이 전해진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소이다.
김 선생은 증언하길, 배 위에서 붉은빛이 번쩍이고 비행물체의 폭음이 들리더니 배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 그로부터 30~40분 뒤 선원 한 사람이 선창으로 내려와 경상도 사투리로 “김대중 선생님, 이제는 살았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는 것인데, 그때 배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시간은 9일 새벽 5~6시께였다는 것이외다.
그렇다면 암살 중지를 지령한 그 비행물체는 어디 소속으로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이었나? 그것은 오늘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이나, 다음해가 되어 잇따라 나를 찾아온 핸더슨과 코언이 전해준 이야기로 미뤄 대체로는 짐작할 수가 있었소이다.
핸더슨이 부인과 같이 나를 찾아온 것은 74년 5월께였는데, 나는 두 분에게 도쿄에서도 이름난 스시집에서 점심을 대접하면서 자세한 얘기를 들었소이다.
핸더슨이 임창영 선생의 긴급전화를 받은 것은 뉴욕시간으로 7일 새벽 2시, 그 전화를 즉시 코언 교수에게, 코언은 곧 라이샤워에게, 마침내 플로리다 키웨스트에서 휴양중이던 키신저 장관에게 사태가 전해진 것은 뉴욕시간으로 새벽 4시(플로리다 시간 새벽 1시)였다는 것이외다. 그때 키신저 장관이 어떤 ‘액션’을 취했는지는 자기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김 선생의 목숨을 살린 그 비행물체가 키신저의 수배에 의한 것이라는 것쯤이야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소이까. 아무튼 플로리다 시간 7일 새벽 1시는 도쿄시간 오후 6시이니, 그 호텔방에서 시작된 전화작전이 2시간 만에 키신저를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오이까. 만일 핸더슨에게 건 전화가 15분만 늦었더라면 김 선생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 참으로 전신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소이다.
훗날 코언 교수도 찾아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내 경력을 모르는 그가 영어를 어디서 배웠기에 그렇게 잘하느냐고 해서 웃었던 기억도 나오이다.
이 전화작전 얘기는 내가 한민통에서 쫓겨난 다음에야 밝혀져 신문에도 나오고, <엔에이치케이>(NHK)의 ‘키 퍼슨스’(Key Persons) 프로에도 나오고 해서, 김 선생 자신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그때 이 일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임 선생은 생전에 종종, 김 선생이 5·18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 와서 4년 동안이나 워싱턴에 머물러 있으면서 바로 옆동네 뉴욕에 있는 자기에게 전화 한 통 안 걸어오더라고 퍽 섭섭해하셨소이다.
마지막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앞서 말한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 얘기오이다. 김대중 납치사건 다음달인 9월, 칠레에서는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나, 아옌데는 반군과 싸우다가 총에 맞아 죽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피노체트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이 바로 키신저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이니, 세상은 참 만화경 속이라고나 해야 되겠는지요.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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