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한 날 발매된 일본의 대표적인 시사비평지 <세카이> 9월호의 표지. 필자의 첫번째 기고문과 함께 김대중-야스에 편집장의 대담이 실려 100만부 넘게 팔리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58
<세카이> 1973년 9월호의 얘기를 좀더 하자면,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난 날 발매된 우연의 일치로, 적어도 이 지성지를 읽는 일본의 지식층 100만명 이상이 ‘제2의 해방’에 대한 나의 견해를 알게 된 덕분에, 망명 뒤 불과 3년이 채 안 되는 시점에서 사회평론가로서의 나의 지위는 확정된 셈이 되었소이다. 이 글은 그해에 발표된 에세이 중에서 ‘베스트 3’으로 선정되어(뽑은 사람은 기쿠치 마사노리 도쿄대 교수) <요미우리신문>(73년 12월 17일치)에 발표되었소이다. 또 나 자신에게조차 약간 놀라웠던 것은 이듬해 8월 일본 영문잡지 <더 재팬 인터프리터>(The Japan Interpreter)가 그 전문을 번역해 발표했는데, 그 글을 소개하는 서문에서 역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소이다. “박 독재정권에 대한 반대운동에서 재일 한국인 지식층은 운동의 최전선을 담당하고 있는데, 여기에 소개하는 투쟁적이며 또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필자 정경모의 논고는 한일관계의 오늘과 내일을 말하는 예언적인 문장이다.” <세카이> 9월호에 자극을 받은 일본 지식인들이 ‘김대중 구출운동’에 앞장서기 위해 조직한 단체가 ‘일한연대연합’(日韓連連)이었고, 그 중심 인물이 아오치 신 선생이었는데, 그는 77년 아사히신문사에서 펴낸 <현대인물사전>의 ‘정경모’ 난에서도, 나로서는 몸둘 바를 모를 만치 과찬의 평을 써 주셨소이다. “정경모의 문장을 구성하는 구미와 동양에 관한 교양은 타협 없는 청렬한 혁명가의 기질을 느끼게 하는 것인데, 문장이 풍기는 격조와 기품은 그의 성격과 교양에서 오는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세카이> 9월호에는 김대중 선생의 육성이 기록된 ‘대화’도 실려 있어, 이것이 일본 사회에 준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으며, 납치사건과 더불어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비난은 마치 활화산의 폭발과 같은 거대한 힘으로 일본인들을 뒤흔들었소이다. 또 한국내의 정치문제를 주의제로 등장시키는 일이 거의 없던 외국의 매체들도 앞다투어 보도하는 바람에 김 선생의 명성은 세계적으로 울려퍼지게 됐으니,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비록 본인은 납치당해 자택에 갇혀 있으되,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정치활동을 전개했던 납치 이전의 김 선생보다 몇배, 아니 몇십배의 힘을 발휘하게 되었던 것이외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고 정권이 붕괴된 것은 79년 10월이었으나, 실상 그 정권의 기반에 금이 가게 한 최초의 타격은 이미 6년 전인 73년 8월의 납치사건과 <세카이> 9월호의 힘이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소이다.
앞 글(47회)에서 ‘미-중’ 수교 회담 때 베이징으로 부랴부랴 자기를 찾아온 사토 일본 총리에게 닉슨이 “한국은 일본 자신의 문제가 아닌가”라고 했다는 말을 전후관계의 해설 없이 인용한 적이 있는데, 좀더 자세히 설명해 보리다. 이 말은 69년 11월 워싱턴에서 발표된 ‘닉슨-사토 회담’의 성명문에 있는 “한국의 안전은 일본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긴요하다”는 부분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이 말을 다시 풀이한다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일본에다 떠넘기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었소이다. 이것이 7·4 남북공동성명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인데, 내가 말한 ‘제2의 해방’은 이런 정치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에세이는 당면한 국내정치보다는 적어도 100년쯤은 거슬러 올라가 동아시아 전체의 움직임을 조감하는 형식으로 서술된 역사논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