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출신으로 극우 노선 덕분에 3선째 도쿄도지사를 지내고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왼쪽). 1965년 ‘독도 밀약’에 서명한 일본 대표의 한 사람으로 금융스캔들에 연루돼 자살한 전 농림부장관 나카가와 이치로(오른쪽). 김대중씨의 망명을 비난한 대표적인 ‘친박정희계’ 일본 우익 정치인들이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60
만주군 육군 소위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가 한국 대통령이 됐을 때, 일본의 우익세력으로서야 얼마나 신바람 나는 경사였겠소이까. 그들은 박정희를 해방 때 마지막 총독이었던 제10대 아베 노부유키의 대를 이은 11대 조선총독쯤으로 여기고 있지나 않았을까.
그러니 박 정권에 반항하는 ‘조센진’은 불령선인이며, 박정희와 맞붙어 싸우다가 일본으로 망명해 온 김대중 따위는 용서할 수 없는 불온분자였다는 건 그들의 논리로 봐서는 당연한 노릇이 아니었겠소이까.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자민당 안에서도 가장 우익적인 그룹이 ‘세이란카이’(靑嵐會·청람회)였으며, 이에 속하는 나카가와 이치로나, 현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 등이 납치당한 김대중씨에게 퍼붓는 욕지거리는 차마 앉아서 들을 수 없는 야비한 것이었는데, 우선 되게 한방 먹인 쪽이 이시하라였소이다.
“김대중은 원래 심정이 저열한 자일뿐더러, 이번 입국(72년 7월 10일)은 불법 입국이었으니만치, 일본 정부가 그의 인권에 대한 무슨 책임이라도 있는 듯이 말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주장이다.” “일본은 한국에 정신적인 부채가 있으니, 김대중 사건에 대해 너무 심하게 박 정권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이시하라의 발언은 ‘한국의 자유, 일본의 자유’(<문예춘추> 1975년 11월호)에서 인용한 것인데, 육영수씨 저격사건에 관한 이 글에서 이시하라는 “범인 문세광은 일본 태생이요 일본에서 성장한 사람이니 반은 일본인 아닌가. 일본 정부는 책임을 느끼고 하루속히 한국에 사죄사를 보내라”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말을 늘어놓고 있었사외다. 빨리 경제원조를 재개하라는 말이죠.
이 글을 읽은 즉시 나는 <문예춘추>를 찾아가 반론을 요구해, 다음 다음호(1976년 1월호)에 ‘이시하라의 자유와 나의 자유’란 글을 써냈소이다. 그 후 여러 군데서 들려오는 얘기로 판단하건대, 내가 날린 일격이 상당히 아팠던 모양이었소이다.
한편 나카가와의 욕지거리는 “남의 나라에 와서 자기 나라 욕을 하고 다니는 김대중은 매국노”라는 것이었소이다. 우리 역사야 이국땅에서 풍찬노숙의 고난을 겪은 망명객들의 애환으로 점철된 역사이니 새삼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독일만 하더라도 나치시대 때 망명객이 되어 히틀러와 싸운 끝에 돌아와 총리직을 맡았던 빌리 브란트와 같은 인물이 있지 않소이까. 일본은 ‘천황이 다스리는 신의 나라’이니만치, 외국으로 빠져나가 자기 나라의 군국주의와 싸운 망명객이 단 한 사람도 없는 역사를 오히려 자랑거리로 아는 나라가 아니오이까. 그런데 난데없이 김대중이 들어와 망명을 선언하고 박정희와 싸우겠다니, 이거야 매국노가 하는 짓이 아니겠소이까.
그러나 일본 사람 중에도 나카가와의 언동을 창피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어느날 <도쿄텔레비전>(12채널)의 쓰쿠시(筑紫)라는 분이 한민통 사무실로 찾아와, 나카가와를 상대로 한판 겨뤄볼 의사는 없는가고 내게 물어봅디다. 왜 없겠소이까.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하고 곧 결투의 준비를 시작하였소이다.
둘이 카메라 앞에 앉자, 나는 그래도 국회의원인 그의 지능지수(IQ)에 대해 경의를 표하느라 잔뜩 준비해 가지고 간 여러가지 얘기를 화제로, 망명이 시(是)냐 비(非)냐 상당히 수준 높은 일반론으로부터 논쟁을 시작하였소이다. <논어> ‘미자’편에 ‘은나라에 어진 사람 셋이 있었다’(殷有三仁焉)는 말이 있소이다. 이들 세 분의 인자는 폭군 주왕 때의 사람들인데, 그중 비자(比者)는 처형당해 죽고, 기자(箕者)는 노예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미자(微者)는 나라를 떠나 망명객이 되었으나, 이들은 모두가 의를 위하여 몸을 희생한 어진 사람이라고 공자는 칭송하였지, 망명했다는 이유로 미자를 매도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도 했소이다.
그러나 이런 차원의 얘기는 그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일 뿐, 도무지 먹혀들지 않았소이다. 시간은 자꾸만 가고 해서, 쑨원(손문) 선생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 존경하는 분이라고 대답을 하더군요. 그래서 다그쳐 물었소이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 때, 혁명이 성공했다는 긴급전보를 선생이 받은 곳이 어디였는지 아는가고요. 그가 알 까닭이 없지요. 나는 큰소리로 외쳤소이다.
“망명지 덴버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내 말이 끝나자 텔레비전 논쟁도 끝나고 나는 완전한 ‘케이오 승’으로 그 자를 때려눕힐 수가 있었소이다. 나가는 길에 나카가와가 다가와서 묻습디다. “어디서 무슨 학교를 나왔소?” 껄껄껄.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둘이 카메라 앞에 앉자, 나는 그래도 국회의원인 그의 지능지수(IQ)에 대해 경의를 표하느라 잔뜩 준비해 가지고 간 여러가지 얘기를 화제로, 망명이 시(是)냐 비(非)냐 상당히 수준 높은 일반론으로부터 논쟁을 시작하였소이다. <논어> ‘미자’편에 ‘은나라에 어진 사람 셋이 있었다’(殷有三仁焉)는 말이 있소이다. 이들 세 분의 인자는 폭군 주왕 때의 사람들인데, 그중 비자(比者)는 처형당해 죽고, 기자(箕者)는 노예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미자(微者)는 나라를 떠나 망명객이 되었으나, 이들은 모두가 의를 위하여 몸을 희생한 어진 사람이라고 공자는 칭송하였지, 망명했다는 이유로 미자를 매도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도 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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