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한민통의 기관지 <민족시보> 주필로 일하던 시절 함께 발간한 영문소식지 <코리아 뉴스레터>(왼쪽)의 영인본. 1974~76년 39회에 걸쳐 격주로 1000부씩 찍어 도쿄의 외교가는 물론 미국 학계와 의회 쪽에도 보냈다. <세카이> 73년 9월호에 실린 ‘제2의 해방’을 영역해서 전재한 <재팬 인터프리터>(오른쪽).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61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신문, 잡지, 텔레비전, 그리고 강연 등을 통한 나의 언론활동은-자화자찬으로 들리지 않을까 망설이며 하는 말이외다만-‘에누리’ 없이 화려했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활발한 것이었소이다. 기자들이 수도 없이 내가 <민족시보>를 내고 있는 한민통 4층 사무실을 찾아오고 말이외다. 운동권 잡지 <올터>(オルタ)의 편집인으로 있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대 교수가 대담기사를 취재하느라 찾아온 자리에서-이건 내가 한민통에서 추방당하고 학숙(글방) ‘씨알의 힘’(シアレヒム)을 창설한 뒤의 얘기지만-김대중 납치사건 당시를 회상하며 “돌연 혜성과 같이 나타난 눈부신 존재”였다고 추어올리는 바람에 무안당한 듯 얼굴이 붉어졌던 일도 생각이 나오이다.(<올터> 1992년 3월호) 이왕 자랑 보따리를 풀어놓은 김에, 심혈을 기울여 발간한 영문 통신지 <코리아 뉴스레터>(KN)에 대해서도 이 기회에 한마디 덧붙여 보고자 하오이다. <코리아 뉴스레터>는 ‘저항의 소리’(Voice of the Korean Resistance)라는 부제 아래 약 1000부가 인쇄돼, 1974년 5월부터 76년 3월까지 39회에 걸쳐 격주로 발행되었는데, 우선 도쿄에 주재하고 있는 외신기자들의 프레스클럽과 외국 대사관들에 무료로 배부되었으며, 내가 개인적으로 알 만한 미국의 대학교수들과 상원의원들에게도 발송되었소이다. 앞서 <세카이>에 실린 ‘제2의 해방’이 영문지 <재팬 인터프리터>(The Japan Interpreter)에 그 전문이 번역되었을 때 실력을 발휘해 주었던 F. 볼드윈 전 시카고대 교수에게 조력을 부탁해 내가 쓰는 원고에 그의 능란한 손질이 가해짐으로써, 비록 작은 매체이나 <코리아 뉴스레터>는 나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효과를 발휘하였소이다. 지금 그 뉴스레터를 묶은 소책자를 들여다보니 제37호(1976년 2월 1일치)에 다음과 같은 글도 있었소이다. ‘국민들에게는 자유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유신체제를 지배하는 박정희 자신은 어떠한 자유를 누리고 있나? 총부리를 겨누고 헌법을 폐지하는 자유, 국회의원들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자유, 정적 김대중을 외국에서 납치하는 자유, 자기를 대통령으로 뽑는 자를 자기가 임명하는 자유, 정부(정인숙)를 중앙정보부를 시켜 살해하는 자유. …이에 비한다면 “짐이 국가”라고 호언한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오히려 온건한 군주가 아니었는가?’
또 제20호(1975년 6월 1일치)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적혀 있소이다. ‘미국은 아직도 이북에 대한 남한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3700만 인구를 결속시키고 있는 정열적인 반공주의라는 환상을 믿고 있는데, 잡지 <사상계>의 편집인이고 반체제 운동의 지도자인 장준하씨는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나. “남한에서 박 정권과 결탁해 이득을 얻고 있는 특권층의 비율은 총인구의 0.3%인데, 이것은 프랑스혁명 당시 부르봉 왕조와 결탁하고 있던 귀족계급이 전 인구에서 차지하고 있던 비율이다. 박정희가 한국의 루이 16세라는 것을 왜 미국은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런데 이 영문통신지 <코리아 뉴스레터>의 발행을 계속할 수 없는 사태가 한민통 안에서 벌어졌소이다. 그 사태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포복절도의 희비극이었고,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게 될 기회가 있겠으나, 아무튼 제39호(1976년 3월 1일치)로 발행을 중지하겠다는 통고가 나간 뒤 왜 그만두느냐, 참 아쉽다는 독자들의 전화와 편지를 많이 받았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