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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아사히신문’ 반입 금지, 박정희의 긴급조치 / 정경모

등록 2009-07-28 18:51

1974년 2월 4일 <도쿄신문>이 마루야마 특파원의 서울발 기사로, 한국 문화공보부가 <아사히신문>에 대한 수입금지 조처를 발표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앞서 <아사히신문> 1월 30일치 석간에 실린 필자의 글 ‘한국의 개헌운동과 긴급조치’를 문제삼은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74년 2월 4일 <도쿄신문>이 마루야마 특파원의 서울발 기사로, 한국 문화공보부가 <아사히신문>에 대한 수입금지 조처를 발표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앞서 <아사히신문> 1월 30일치 석간에 실린 필자의 글 ‘한국의 개헌운동과 긴급조치’를 문제삼은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62
얘기가 다음에 전개될 상당히 복잡스런 화제로 넘어가기 전에, 독자들의 기억을 새롭게 한다는 뜻에서, 이제까지의 줄거리를 간추려보고자 하오이다. 내가 일본으로 망명해 온 지 불과 2년 만인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나오고, 그 두 달 뒤인 9월 ‘남북통일의 새아침을 맞이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첫번째 저서 <어느 한국인의 감회>가 아사히신문사에서 출판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소이까. 그 직후, 그 책 덕에 망명객 김대중 선생을 만나게 되고, 또 연이어 <세카이> 편집인 야스에가 동지로서 나를 맞이해준 덕분으로 ‘한국의 제2해방’을 집필했던 것인데, 기묘하게도 김대중 선생이 납치당하던 바로 그날 1973년 8월 8일, <세카이> 9월호가 전국적으로 발매되는 바람에, 거기에 실린 내 글을 적어도 100만명이 넘는 일본 지식인들이 읽어주는 기적이 발생하였던 것이외다.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에도 박정희 독재정권을 상대로 한 나의 ‘1인 투쟁’은 신문, 잡지, 텔레비전, 강연, 영문통신지 <코리아 뉴스레터> 등을 통하여 끈질기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듣기에 따라서는 약간 허풍으로 여겨질 만큼 앞글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소이다만, 이 ‘1인 투쟁’의 절정은, 73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는 장준하 선생을 멀리서 생각하면서 내가 <아사히신문>에 쓴 글로 화통이 터진 박정희가 <아사히신문> 수입금지령을 내리는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소이다.

정적을 외국에서 납치하는 범죄를 서슴지 않는 유신 독재자의 행패를 규탄하면서, 장 선생과 백기완 선생 등 30여명의 재야인사들이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100만명 서명운동’을 시작한 것인데, 요원의 불길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었을까. 73년 12월로 들어서서야 시작한 이 운동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서명자가 100만을 돌파할 기세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소이다.

이에 놀란 박정희는 우선 장 선생을 잡아 가두고, 해가 바뀌자마자 헌법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를 발령하였소이다.(74년 1월 8일) 이 꼴을 보고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었겠소이까. 그래서 쓴 글이 ‘한국의 개헌운동과 긴급조치’였는데, 이것이 <아사히신문>(74년 1월 30일치 석간)에 나가자, 한국 정부는 2월 4일 당시 하루 1500부 남짓 들어오던 이 신문의 수입을 금지시켰소이다. 문공부 대변인은 내 이름 정경모를 들어 ‘친공분자’로 규정하고 개헌운동이나 긴급조치에 대해 “이와 같은 분자가 쓴 악의에 찬 논평과 기사를 게재하면서 마치 북조선의 대변지와 같은 보도를 일삼는 아사히에 대해 금수조치를 취하는 바이다”라는 성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소이다.

내가 쓴 글에 대해 박정희가 왜 그토록 화를 냈는지 약간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유신헌법도 명색이 헌법이니만치 개정에 대한 수속의 규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소이다. 헌법의 개정은 ①국회의 의결, ②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결, ③국민투표에 의한 확정이라고 하는 3단계의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이 3단계의 절차는 모두가 낙타를 위해 설정된 바늘구멍이었지, 절대로 통과가 불가능한 절차였소이다. 나는 이 3가지 절차가 얼마나 야비하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기만인가를 밝힌 다음, 한국 문제에 대해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가 발표한 ‘풀브라이트 보고서’(73년 2월)의 결론 부분(제14장)을 소개했소이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었소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일인지배체제를 반대하는 한국인으로서는 극단적인 비합법적 수단을 동원하는 방법 말고는 박의 퇴진을 요구할 길이 없는데, 실제로 박이 자진해서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죽거나, 또는 혁명이 일어나거나, 이 3가지 선택지 외에 달리 박의 퇴진을 실현시킬 방도는 없을 듯하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결국 그 6년 뒤 박정희는 풀브라이트가 예측한 제2의 선택지대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권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퇴진하게 되는 것이나, 내가 쓴 글 때문에 박정희가 화통이 터져 <아사히신문>에 대해 수입금지령을 내리다니, 한편 놀라면서 또 한편 내 속이 얼마나 시원하고 상쾌했겠소이까. 붓을 움직이는 내 손에 그만한 힘이 있었던가, 스스로 놀라움을 느끼는 동시에, 그러한 힘을 내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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