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통에서 추방당한 뒤 1979년 사숙 ‘씨알의 힘’을 연 필자는 81년부터 잡지 <씨알의 힘>(왼쪽)도 펴냈다. 잡지의 제6호(1983년 6월)에 실렸던 여운형·김구·장준하 세 선각의 ‘운상경륜문답’을 다듬은 <찢겨진 산하>는 86년 해적판(오른쪽·거름)으로 나와 국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68
‘한민통에서 쫓겨난 정경모는 이제 침 먹은 지네 꼴이니 꼼짝도 못할 것’이라고 그 사람들은 믿었겠지만, 실상 나는 그때 잠시 집에서 쉬면서 충전을 한 다음 움직이기 시작하였는바, 그것은 미리부터 구상해오던 사숙(글방)을 근거로 하는 다양한 활동이었소이다. 시부야에서도 일등지인 언덕 마루터기에 자리잡은 마루상 빌딩에 20평은 채 안 되나 20~30명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방을 계약하고 거기에다 사숙 ‘씨알의 힘’(シアレヒム)이라는 간판을 걸었소이다. 함석헌 선생께서는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를 내면서 천하를 호령하였거니와, 나는 함 선생보다도 욕심이 더 컸던지 ‘씨알의 힘’을 간판으로 하여 체내에서 넘쳐 흐르는 힘을 발휘해 보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겠소이까. 그때가 1979년 4월이었으니, 내가 한민통을 떠난 지 약 1년 남짓 뒤의 일이었소이다.
이 사숙을 근거지로 하여 우선 사람들을 모아 우리말을 가르치는 한편, 일본과 우리나라가 겪어온 역사를 강의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에 관해 사상교육을 했소이다. 그 교재로서 잡지 <씨알의 힘>(シアレヒム)을 내고 강연회도 열고 했는데 그때 내 나이가 쉰다섯, 어디서 그런 힘이 용솟음쳐 올라왔는지 지금 돌이켜보아도 신기할 정도였소이다.
<아사히>나 <마이니치>나 일본의 각 신문들이 사숙을 알리는 기사를 써준 덕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나를 스승으로 여겨주는 제자들은 남북을 가리지 않는 재일동포뿐만 아니라 일본 사람들도 많이 섞여 있어, 나의 행동 범위는 경계가 없는, 참으로 해방된 자유공간이었소이다.
내가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한민통에서 쫓겨난 것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한민통과의 관계를 끊는 동시에, 각자 할 수 있는 한 재정적인 원조도 아끼지 않았소이다. 그중에는 10만원짜리 어음을 열다섯 장이나 끊어주면서 한 달에 한 장씩 은행에다 넣어 현금으로 찾아 쓰라는 동지도 있었고, 내가 자립할 때까지 몇해 동안을 마치 세금을 물듯이 한달에 10만원 혹은 5만원씩 원조금을 정기적으로 보내준 동지도 있었사외다.
그 사무실의 계약금 240만원과, 집기 일체의 비용을 포함해 500만원을 내게 쥐여주면서, 이건 배동호씨가 와서 달라던 500만원을 거절하고 대신 주는 돈이라고 하던 분은 물론 앞서 말한 문병언 동지였소이다.
아무튼 잡지 <씨알의 힘> 창간호가 나간 것이 81년 5월이었는데, 한 권 400원으로 값이 매겨진 창간호를 발송하면서, 내용을 읽고 공감을 느꼈다면 10호분 4000원을 선불해 달라고, 말하자면 내가 독자들에게 떼를 쓴 것인데, 나도 놀랐어요. 1600명이 넘는 독자들이 흔쾌히 선불에 응해줌으로써 700만원 가까운 돈이 들어왔소이다.
창간호는 80쪽쯤의 얇은 것이었으나, 예를 들어 제6호나 제9호는 150쪽이 넘는 부피의 퍽 두툼한 것이어서,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면서 87년 10월 9호로 일단 막을 내렸소이다. 91년 7월부터는 16쪽으로 된 팸플릿 형식의 간행물 <씨알>(粒)을 창간해 2004년 8월 제42호까지 펴냈소이다. 약 13년에 걸쳐, 정점관측(定点觀測)이라고나 할까. 그때그때의 시사 문제를 다루면서, 그것이 일본과 미국과, 또 우리의 남북문제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입체적인 시점을 독자들에게 제공하였소이다. 어느 일본 독자는 “<씨알>은 미니컴이지만 매스컴이 보여주지 않는 시점을 제공해 줌으로써 지금 일본에는 <씨알>을 읽는 일본인과 읽지 않는 일본인, 두 종류가 살고 있습니다”라며 과찬치고도 좀 심한 과찬을 해줬소이다. 또 많은 총련계 동포들이 자기네들 조직에서 나오는 어느 기관지보다도 <씨알>을 열심히 읽어주었다는 것도 꾸밈없는 사실이었소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씨알의 힘>(1993년 6월 제6호)에 실렸던 ‘찢겨진 산하’를 상기하시는 분이 더러 있으리라고 믿소이다. 이것이 ‘거름’인가 하는 출판사에서 해적판이지만 번역되어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다는 것은 여기서도 듣고 있었으며, 당시 건국대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방기중 선생(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 2008년 작고)이 학생들에게 리포트를 쓰라고 한 죄로 6개월 징역살이를 했다는 눈물겨운 얘기도 듣고 있었사외다.
언젠가 나를 찾아온 전 국회의원 김희선(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의 손녀)씨가 옥중에 있을 때 그 책을 꼭꼭 감춰두었다가 새로 들어오는 ‘빵잽이’들에게 필독서로 읽혔다는 일화도 들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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