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4월 문익환 목사의 옥중서간집 <꿈이 오는 새벽녘> 일어판을 번역해낸 ‘씨알의 힘’의 숙생들과 필자(가운데)가 일본 신문에 소개됐다. 4명의 공동 번역자들은 모두 평범한 일본의 주부들이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71
<꿈이 오는 새벽녘>의 일어 번역판을 위해 문익환 목사께서 내게 보내주신 서한문은 앞글에서 소개한 바와 같소이다만, 여기서는 <꿈이 오는 새벽녘>의 번역을 끝내고 내가 옥중에 계신 문 목사에게 보낸 서한문을 소개하고자 하외다. 내가 ‘씨알의 힘’ 글방에서 이 편지를 쓴 때는 1986년 7월이었는데, 이때 문 목사께서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죄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이었으며, 6월 초하루의 생일을 여섯번째 옥중에서 보내신 때였소이다. ‘익환 형님께,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을 일으키신 이래 형님께서는 생일을 여섯번째 옥중에서 보내게 되셨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굳으신 분들이라 하나, 용길 아주머님이나 고령이신 자당께서 얼마나 가슴 아파하고 계시겠습니까. 나는 익환 형님을 생각할 때보다 더욱 절실하게 우리가 그렇게까지 열광적으로 맞이했던 그해(1945년) ‘해방의 날’의 해방이 결코 해방이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느낄 때가 없습니다. 일제시대 때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죄인으로 붙들려 들어가,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빼앗겼던 현저동 101번지의 형무소 안에 지금 익환 형님께서 죄인으로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이 응변으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형님의 죽마지우 윤동주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참살했던 힘, 형님의 막역지우 장준하를 약사봉에서 모살한 힘, 그리고 지금 익환 형님이 거느리시는 ‘민통협’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서, 그 ‘수괴’인 익환 형님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힘은, 비록 외면적으로 그 형태는 다를망정 뿌리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동일한 힘이 아니겠습니까. 민족에게 자유가 없었다는 것이 누구의 눈에나 명명백백했던 일제시대에 비하여, 지금은 마치 그것이 있는 듯이 보이게 하는 교묘한 제도적 장치가 있느니만치, 사태는 더욱 심각하며 더욱 비극적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직 나이 어려 빛과 어둠, 단것과 쓴것의 구별조차 확실치 않았을 무렵, 불가사의한 인연으로 형님을 만나, 말씀하신 대로 유랑과 고뇌의 먼길을 돌고 돌아 오늘 뜨거운 동지애로 재회를 이루었다는 것, 얼마나 얼마나 감사히 여기고 있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형님과 내가 미군 군복을 입고 일반 일본인에 비해 엄청난 금액의 월급을 받으면서 맥아더 사령부(GHQ)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나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모세의 환영(幻影)이었습니다. 바로(파라오)의 궁전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히브리 백성이었던 모세가 자기 민족을 박해하는 바로의 궁전을 빠져나가 겨레들이 살고 있는 미디안 땅으로 도망쳤다는 것을 떠올릴 때마다, 상징적으로 말해 바로의 궁전인 사령부에 대한 거부감을 억누를 수가 없었으며, 자기 발로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추방이라는 형식으로 나는 바로의 궁전을 떠날 수가 있었으나, 형님과 내가 같은 고뇌를 겪고, 더구나 내가 우리의 민족주의는 편협한 애국주의를 벗어나 보편적인 정의와 인류애를 바탕으로 해야 된다는 형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일본 여성을 일생의 반려로 삼은 뒤, 지금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형님은 형무소생활을 되풀이하면서, 나는 또 나대로 망명생활을 계속하면서, 동지로서 다시 만나게 된것은 조물주의 섭리에 의한 것이 아닐까, 무릎을 꿇고서 묵념에 잠길 때도 있었습니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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