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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대표 친일파’ 이완용 가문은 ‘풍비박산’

등록 2009-08-14 14:17

[친일·항일 ‘굴곡진 100년사’]
장남은 요절, 차남은 일본 귀화
증손자 92년 땅찾기 소송 ‘눈살’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경술국치’ 당시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이완용(1858~1926) 가문은 해방 이후 멸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이완용 자신도 ‘대표 친일파’로 악명이 높았던 탓에 살아생전 자객의 습격을 받아 생사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완용은 공식적으로 승구·항구 두 아들을 두었지만, 장남이 1905년 요절하는 바람에 차남 항구의 아들인 병길이 가문을 이었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1930년대까지는 거부 명단에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이후 기록에선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송병준 등 다른 ‘매국노’들의 경우, 자손 간의 다툼으로 재산이 공중분해됐다는 사실을 당시 신문 기사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가 도입되면서 조선 귀족들의 효용 가치는 더욱 줄었고, 일제의 푸대접도 심해졌다. 이완용은 3·1운동 이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4월5일치 1면 톱으로 “동포의 자중을 당부한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지만, 효과가 없었던 듯 2·3차 경고문은 사회면 중간으로 줄어들었다.

해방 이후 이병길은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로 반민특위가 무력화된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92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땅 712평(당시 시가 30억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내고 승소해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이윤형이 그의 아들이다. 이윤형은 그 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2002년께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차남 이항구는 해방 직전인 1945년 3월에 숨졌다. 일제 말기라 그 아들인 이병주가 작위를 물려받았지만 특별한 친일행위가 확인되지 않아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는 1962년 일본으로 밀항해 귀화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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