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 장군의 아들인 신병욱씨가 12일 오후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2리에 복원된 신돌석 생가를 둘러보고 있다. 영덕/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신 의병장 후손 화전 일구며 힘겨운 삶
친일기업가 문명기 손자는 의원에 장관
친일기업가 문명기 손자는 의원에 장관
1878년, 경북 영덕군을 무대로 활동한 두 인물이 태어났다. 한 사람은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서른 살에 삶을 마쳤고, 다른 이는 친일파로 아흔 살까지 장수했다. 그의 장손은 장관과 4선 의원을 지냈다. 이들이 세상을 뜬 지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년이 지났지만 그들이 남긴 ‘그림자’는 후손과 지역사회에 길게 드리워져 있다.
지난 12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2리 평민 의병장 신돌석(1878~1908)의 유적지에서 만난 아들 신병욱(85)씨는 평범한 촌로의 모습이었다. 신돌석이 자손 없이 눈을 감자 부인이 시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신씨는 어려서부터 40년 가까이 초근목피의 가난을 헤쳐왔다. 어머니와 경북 영양군으로 이사해 화전을 일구기도 했고, 다시 영덕으로 돌아와서는 과일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 신씨는 “먹을거리가 없어 어머니와 누룩을 빻아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나마 1962년 아버지한테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면서 유족연금을 받게 돼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졌다.
신돌석 장군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듬해 의병을 일으켰다가 불과 2년 만인 1908년 영덕군 지품면에서 보상금을 노린 마을사람에게 살해됐다. 영덕군은 그의 사후 91년이 지난 1999년에야 장군의 유적지를 조성했다. 신돌석을 연구해온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기념관을 지을 때까지도 신돌석은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신화로만 떠돌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평남 안주에서 출생한 자본가 문명기(1878~1968)는 1907년 영덕군 지품면에 제지공장을 차렸다. 수산업, 광산업으로 큰돈도 벌었다. 지풍면 신양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김아무개(87) 할머니는 “마을사람들 중에 문명기 광산에서 일 안 한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문명기는 1941년에는 중추원 참의에 임명됐다. 광복 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으나,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처벌을 면했다. 문명기의 장손 문태준씨는 1967년 영덕에서 국회의원(민주공화당)에 당선돼 4선 의원을 지냈고 노태우 정권 때는 보건사회부 장관에 올랐다. 지역 주민 공아무개(44)씨는 “어릴 때 문태준 의원의 사진이 실린 달력이 집집마다 걸려 있었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뒤늦게 신돌석 기념사업이 펼쳐지면서 후손들은 지역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반면 문명기에 대한 평가는 복잡다양하다. 신양리 이장인 남진호(63)씨는 “친일을 했지만 지역에 도로도 건설하는 등 일을 많이 했고 지금도 영향력이 남아 있어 의견이 분분하다”고 말했다. 주중호 영덕문화원 이사는 “이 지역은 해방 뒤 항일과 친일의 역사가 정리되지 않았다”며 “마을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덕/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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