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굴곡 많은 일대기〈4〉 집념
대권 향한 도전과 좌절…‘3전4기’ 정권교체 신화
대권 향한 도전과 좌절…‘3전4기’ 정권교체 신화
그는 1985년 2·12 총선 직전 미국에서 귀국해 71년 대선 패배 이후 타의에 의해 중단했던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는 87년 6월항쟁과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욕심은 분열을 낳았다. 그는 대선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뒤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87년 12월 대선에 도전했지만 ‘3등’에 그치는 치욕을 당했다. 하지만 4개월 뒤 소선거구제로 바꿔 치른 13대 4·26 총선에서 제1야당을 차지해 정치적으로 부활했다. 호남표의 결집에 따른 의외의 결과였다. 믿을 수 없는 강도로 결집하기 시작한 호남표는 다른 지역의 반발을 불러와 그의 앞날에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제1야당 총재였던 그는 90년 1월 3당 합당 때까지 정국을 주도했다. 노태우 정권의 합당 제의를 거절한 그는 92년 3·24 총선을 앞두고 ‘꼬마 민주당’과의 통합에 성공했다. 민주당은 92년 총선에서 97석을 차지했다. 야권 단일후보라는 명분을 쥔 그는 92년 12월 대선에서 ‘영원한 동지이자 맞수’였던 김영삼 후보와 정면승부를 벌였다. 하지만 지역감정의 벽은 완고했다. 200여만표 차로 패배한 그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영국에 6개월 동안 머문 뒤 귀국한 그는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해 통일 연구에 몰두했다. 집도 아예 동교동에서 일산으로 옮겼다. 하지만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95년 지방선거 지원 유세는 그에게 정계 복귀의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민주당은 서울시장을 차지했고, 그는 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96년 4·11 총선에서 국민회의는 겨우 79석을 차지해 그의 정치적 생명을 위협했으나, 97년 5월 당내경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됨으로써 ‘마지막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9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과거와 전혀 다른 전략을 세웠다. ‘지역연합론’을 바탕으로 자민련의 김종필·박태준씨와 손을 잡은 것이다. 여기에 여당 후보의 분열, 외환위기 충격이란 상황에 힘입어 마침내 대통령 선거 3전4기의 신화를 완성했다.
이유주현 송호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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