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두 사람의 숙명적인 대결은 1945년 8월 첫 만남 때부터 비롯됐다. 장준하(왼쪽)는 광복군 제3지대 소속의 육군 중위로, 박정희(오른쪽)는 일제의 괴뢰국 만군의 육군 소위로 베이징에서 해방을 맞았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77
박정희와 장준하가 정적으로서 서로 맞붙게 된 것은, 1963년 대통령선거 때 박의 대항후보였던 윤보선씨의 선거운동을 장준하가 앞장서서 도왔던 때부터였을 것이나, 첫 대면은 그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해방 직후인 45년 8월이었고, 만난 장소는 중국 베이징이었소이다.
만주국(일제의 괴뢰국가) 군 출신인 박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편입되어 제57기생으로 졸업한 해가 44년이었으며, 해방 당시 소속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곳은 베이징의 동북 120㎞에 위치한 평곡이라는 마을이었는데, 그 마을은 바로 옆에 만리장성이 달리고 있는 점으로 보아 박의 부대는 팔로군(중국 공산당) 내지 팔로군과 행동을 같이 하고 있던 조선인 항일독립의용군에 대한 토벌이 목적이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소이다.
이듬해 일본군의 패망이 알려지자, 박은 재빨리 군복을 평복으로 갈아입고 몇 사람의 조선인 동료와 더불어 동포들의 피란민 대열에 섞여 베이징에 도착한 것인데, 거기에는 거류민 보호를 위해 이미 충칭에서 파견되어 와 있던 광복군 부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외다. 장준하는 광복군 제3지대를 거느리는 김학규 장군 휘하의 육군 중위로서, 만군 육군 소위 박정희를 거기서 처음 만나게 된 것이었소이다.
그러면 장준하는 누구인가. 20대의 학생 장준하가 일본신학대학 재학 중 조선인 ‘학도지원병’으로 징집되어 평양 제42부대로 배속된 것은 41년 1월이었으며, 명령에 따라 부대와 더불어 중국을 향하여 고향(평북 삭주)을 떠나면서 남긴 말은 “나는 나의 할 바를 다하고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는데, 그가 말한 ‘나의 할 바’라는 것은 일본군을 탈출하여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가겠다는 뜻이었소이다. 떠나면서 그가 부인 김희숙 여사에게 남긴 편지에는 ‘로마서 9장 3절’의 말씀이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의 말 “내가 형제와 골육을 위하는 일이라면(즉, 사랑하는 민족을 위하는 일이라면) 비록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하여도 이는 원하는 바이라”는 구절이었는바, 만일 중국에서 보낸 서신 말미에 이 구절이 적혀 있을 때는 일본군에서 탈출했다는 뜻으로 알라고 귀띔을 해두었다는 것이외다.
드디어 부인에게 뜻을 전하고서 서주의 일본군 쓰카다 부대 병영을 탈출한 것이 45년 1월 31일이었으며, 거기서부터 약 3개월 동안 걸어서 2400㎞의 험산준령을 넘어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에 도착해 김구 산하의 광복군과 합류하게 된 것이 그해 4월이었다는 것이외다.(이상 장준하 저 <돌베개>에서)
한편 만군 군관학교를 졸업할 때 만주국 황제 앞에서 “나는 대동아공영권을 수립하는 성전을 위하여 벚꽃과 같이 깨끗이 질 각오”라는 말을 남겼다는 박정희는 일본 육사로 편입된 뒤에도 일본인다운 행동거지가 하도 유별날 뿐만 아니라, 천황 폐하에 대한 충성심 역시 뛰어나게 열렬한 까닭에 육사 교장이 전교생을 모아놓고 “다카기(박정희)군은 비록 출신은 반도인일망정 일본인다운 점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찬사를 보냈다는 것이외다.
그 후 일본인 학우들로부터 ‘특등 일본인’이라는 별호로 불렸다는 것인데(<일본인과 조선인> 김일면 지음), 실상 79년 박정희가 김재규한테 암살당했을 때, 많은 일본인들이 “최후의 제국군인이 죽었다”고 그의 죽음을 애처로워했던 것이외다. 국장 때 일본 정부의 조문사로 참석한 사람이 일본 정계의 만주벌 총수이고, 또 한국의 국가보안법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였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 애도의 뜻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 만하지 않소이까.
언젠가 장준하는 박정희를 만난 자리에서 홧김에 “만일 일제가 그냥 계속되었더라면 너는 만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이 아닌가”라고 면박을 준 일이 있다더군요.(<신동아> 85년 4월호)
홧김에 한 이 말은 실상 장준하 자신이 의식했던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바이외다. 어느 모로 보나 독립투사임에 틀림이 없는 장준하는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경험했으며, 끝내는 목숨마저 잃지 않았소이까?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또 그것을 자행한 인물이 옛날의 만군 소위였다면 ‘만일 일제가 그냥 계속되었더라면’의 가정법 서술과는 다른 뜻이 포함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오이까.
이 얘기는 대강 <씨알의 힘> 제9호를 바탕으로 하여 쓴 글임을 밝혀두는 바이오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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