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당시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이었던 기우치 아키타네가 훗날 외교관으로 타이 왕실을 방문하고 있는 모습.(왼쪽) 그는 국제앰네스티의 ‘사형수 김대중 구명 요청’을 거부하며 한국인을 비하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78
1987년 문익환 목사의 옥중서한집 <꿈이 오는 새벽녘>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을 때, 문 목사께서 내게 보내신 편지를 앞서 소개한 적이 있소이다. 독자들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그중 한 구절을 여기서 다시 한번 되풀이하면, 문 목사는 나에게 “일본의 양심을 일깨우며 그들로 하여금 두 번 다시 과거에 걷던 같은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귀형은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랑하는 아내의 조국이며, 핏줄로 말한다면 반은 두 아들의 조국이기도 한 일본에 대한 사랑 때문일 것이다”라고도 지적하셨소이다. 그리고 또 나를 비유하여 “범의 새끼를 잡으려고 맨손으로 범의 굴로 들어간 사냥꾼”이 아니냐고도 말씀하셨는데, 맞는 말이지요. 내가 있는 곳이 바로 호혈 아니오이까. 다만 붓 한 자루를 들고 뛰어들어 그 우글대는 사나운 것들을 이리 치고 저리 때리고 하였으니 스스로 헤아려 보아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으나, 그건 굉장히 역설적으로 말해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적인 득실에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뜻에서 나는 오히려 강자의 위치에 설 수가 있었던 까닭이 아니었겠소이까.
광주 5·18항쟁으로 김대중씨에게 생명의 위기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을 무렵, 일본에서는 “한국이 어떠한 선택을 취하든 간에 주권국가인 한국 자신의 권리일 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식민지로 그 나라를 지배한 일본으로서 쓸데없이 용훼할 문제가 아니다”라는 기묘한 논리로 은근히 김대중 처형을 두둔하는 자들이 관료층이나 우익세력 안에서 횡행하고 있었소이다. 또 이러한 무리들의 사고방식의 특징은 한국인이란 남북을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할 만한 능력이 생태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민족이니만치, 광주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해 봤댔자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소이다.
5·18이 일어난 직후인 80년 8월 어느날, 화가 북받쳐 얼굴이 벌게 가지고 ‘씨알의 힘’ 사무소로 나를 찾아온 두 사람의 서양인이 있었소이다. 한 명은 R. 우스팅이라는 네덜란드 사람이고, 또 한 명은 E. 베이커라는 미국인이었는데, 베이커는 우리말을 썩 잘할뿐더러 한국사 연구의 동료로서 나하고는 가까이 지내온 친구였소이다. 이 두 사람은 국제앰네스티를 대표해서 김대중씨의 안부를 확인할 목적으로 우선 한국대사관을 찾아갔으나, 비자가 거부되자 차선책으로 일본 외무성을 찾아갔다는 것이외다. 거기서 만난 것이 아시아국장 기우치 아키타네였는데, 김대중씨는 일본에서 납치되어 간 사람이니만치 일본 정부로서도 관심을 갖고 대책을 강구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하자, 기우치 국장이 다음과 같이 답변하더라는 것이었소이다. “한국인은 원래가 무지몽매한 백성(backward people)이며,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니, 김대중 문제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베이커와 우스팅의 앰네스티 대표단이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서 나를 찾아온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이었는데, 내가 당장 무슨 조처를 취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때를 기다렸소이다.
그러던 차에 상당히 큰 강연회가 오사카에서 열려 거기에 참가할 기회를 타가지고 공개적으로 기우치의 망언을 규탄하는 동시에 이처럼 천박하고 야비한 인물이 외무성 아시아국장으로 있다는 것은 한국은 고사하고 일본 자체의 국제적인 체면에 먹칠을 하는 처사라는 점을 지적했소이다.
그때 강연 내용을 줄거리로 하여 투고문을 작성해 오사카 지역판 <아사히신문>으로 보냈더니, 그것이 그해 12월 6일치 ‘논단’에 실려 상당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소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나 기우치는 그해 4월 22일 어느 공개 석상에서 ‘일본이 만일 장(將)이라면 한국은 그것을 지키는 상(象)’이라고,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장기판의 관계로 설명했다는 것이외다.(<韓國を視る視点> 요시오카 요시노리 지음, 백석서점 1980년)
나는 두고두고 끈질기게 기우치의 이따위 발언을 공개적으로 규탄하면서 “그래도 졸은 아니고 상쯤으로는 알아주는 모양이니 참 고맙다”고 비꼬는 말을 되풀이하였는데,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항의나 반론하는 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소이다.
내가 망명했을 때 신원보증을 서준 아사히신문사가 우익단체로부터 항의를 받고 있다는 말은 오늘까지도 심심찮게 듣고는 있소이다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