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한국사회는 ‘마침내’ 건국 이후의, 나아가 개항 이래의 한 역사적 마침표를 찍었다. 한 거대한 생애가 공동체에게 던지는 자장은 매우 크고 길어, 오랜 시간 여러 측면에서 되새겨야 할 것이나 우선 ‘지금 여기에서’ 김대중 이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여 이 마침표를 새 출발점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인가? 김대중은 삶과 죽음이 절묘하게 일치하는 생애를 보여주었다. 그가 삶에서 추구하였던 가치들은 죽음의 시점에서도 그대로 표출되었다. 가장 먼저 기려야 할 유산은 남북화해와 평화, 통일에의 헌신이다. 김대중은 죽음을 통해 북한 공식 조문단을 불러들여, 꽉 막힌 남북대화와 관계개선의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정부는 그의 죽음이 제공한 이명박 정부 하 최초의 고위급 남북대화를 민족의 상생·공영과 한반도 비핵화·평화를 위한 디딤돌로 적극 선용해야 한다. 거기에는 정주영-정몽헌-현정은으로 이어지는 현대가(家)의 창조적 기업가 정신과 실용주의도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즉 김대중-정주영-김정일 조합이 이루어낸 드라마를 이명박-현정은-김정일이 재연하자. 현대가의 뚝심과 실용에 바탕한 소떼 방북·금강산 관광(정주영-김정일)으로부터 남북정상회담(김대중-김정일)까지의 극적인 도정은, 이제 또 다른 뚝심과 인내가 이룬 김정일-현정은 ‘5개항 합의’로부터 새로운 이명박-김정일 공동 비전과 합의로 성큼 비약되어야 한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은 정주영의 창조성, 모험성, 실용성을 체득한 현대 출신이 아닌가? 화해와 일치는, 갈라진 오늘의 우리사회에게 요구하는 김대중의 죽음이 남긴 또 다른 과제이다. 5년반의 투옥, 3년여의 망명, 6년반의 가택연금이라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취임 이후 그는 정치보복을 감행하지 않았다. 게다가 최대 정적 박정희의 기념사업을 허용·지원하였고, 자신을 사형하려 한 전두환·노태우를 용서하였다. 또 청년기 자신을 처형하려했던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도 공존과 포용의 손길을 내밀었다. 죽음을 맞아서는 최대의 동지이자 경쟁자인 김영삼 역시 아름다운 화해를 표하였다. 민주·인권·노동·(남북)협력 정책과 인사들이 좌파·급진·친북·반미로 배제되며 탄압받는 오늘의 현실은 우리사회의 화해와 통합에 반한다. 이명박 정부가 ‘국장’ 결정의 예우 정신을 국정 기조와 운영에서도 예우하길 소망한다. 끝으로는 국제연대와 글로벌 기준이다. 1970년대와 80년대 워싱턴, 도쿄, 베를린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한국민주화 운동 연대의 한 축은 김대중 구명·구원과 직결되어 있었다. 박정희의 산업화가, 오늘날 20세기 후발 산업화의 한 상징적 모델로 받아들여지고 있듯 한국민주화의 역사는 냉전시대 국제 민주·인권연대의 한 표상이었고, 그 중심 한켠에 김대중이 있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김대중이 남한에서 추구한 민주주의·인권·자유·관용의 가치가 세계적이고 보편적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은, 그 개인은 물론 한국사회가 추구하고 도달한 보편가치에의 상찬이랄 수 있다. 지금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인권·노동·복지·평등·평화 정책이 과연 21세기 글로벌 기준과 국제연대에 부합하는지 성찰 또 성찰하자. 이제 김대중의 업적과 한계는 역사가 되었다. 그 업적을 되살리고, 한계를 보완하여 이 공동체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과제는 남은 자들의 것이 되었다. 시민들과 대통령은 이를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가? 한 거인의 사거 앞에서 우리가 ‘김대중 이후’를 깊이 사려해야 하는 이유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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