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7월 일-러 제국주의 팽창 정책에 따라 한반도의 식민지배를 결정한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두 당사자, 미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왼쪽)와 당시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오른쪽). 태프트는 훗날 27대 대통령에 올랐고, 가쓰라는 11·13·15대 총리대신을 지내며 한-일 병합을 주도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82
일본인들이 ‘선각자’로 숭앙하는 우상은 앞글에서 말한 오카쿠라나 니토베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나라에는 학계에조차 별로 알려지지 않은 진짜 왕초 우상이 또 따로 있으나, 이에 대한 언급은 뒤로 미루고, 우선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되기 이미 두 달 전인 1905년 7월,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의 총리 가쓰라 다로 사이에 성립된 밀약에 대해서 몇 마디 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바이외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알려진 미-일간의 이 비밀거래를 알아두는 것이 뒤에 올 얘기, 즉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미국의 속셈이 무엇이었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 까닭이외다.
태프트가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를 포함한 약 80명의 일행을 이끌고 필리핀 방문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것은 그해 7월 8일이었으며, 배가 요코하마에 도착한 것이 7월 25일이었는데, 다음날인 26일 태프트는 메이지 천황을 알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날 밤 제국호텔에서 베푼 총리 가쓰라 주최의 만찬회에 참석하는 등 일행은 일본 쪽으로부터 최대한의 융숭한 접대를 받았소이다.
문제는 7월 27일 오전부터 시작된 태프트와 가쓰라 사이의 장시간에 걸친 밀담인데, 그 자리에서 양자간에 성립된 양해사항은 간단히 말해서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소이다.
태프트가 이 밀담의 내용을 전보로 본국 정부에 보고한 것은 7월 29일이었으며, 이 전문 보고서를 읽은 루스벨트가 그 내용을 전면적으로 승인한다는 답전을 태프트에게 띄운 것이 7월 31일. 그리고 이 답전을 받은 태프트가 마닐라에서 가쓰라에게 그 내용을 알리는 전문을 띄운 것이 8월 7일이었소이다. 보통 ‘태프트-가쓰라 밀약’으로 알려진 문건은 7월 29일 태프트가 일본에서 워싱턴으로 보낸 전문을 말하는데, 미국이 국제법상의 조약도 아닌 밀약의 형식으로 비밀리에 일본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으리라 믿는 바이외다.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일행과는 별도로 한국을 방문하고자 9월 19일 서울에 도착했는데, 그때 고종 황제는 미국의 환심을 사고자 그 처자에게 기마대를 선두로 하는 황실용 마차를 사용케 한다든가, 예포를 쏘아 경의를 표한다든가 하는 환영 행사를 열 예정했으나 일본 사람들의 반대로 그것조차 실현되지 못했소이다만, 실현되었다 한들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되었겠소이까.
1882년 4월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에는 ‘필수상조’(必須相助)라는 문구가 있어, 그것을 우리 할아버지들은 “만약에 일본이 조선을 침탈할 때에는 미국은 우리를 도와 일본을 막아준다”는 약속이라고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외다.
당시 미국 공사관 비서로 있던 스트레이트는 그때 한국인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었소이다. “일본인 같으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고, 중국인 같으면 끈질기게 저항할 만한 상황에서, 한국인은 이리저리 말을 바꾸면서 잔꾀를 부리려 든다.”
이왕 얘기가 여기까지 온 김에 당시 아직 서른 살 나이의 젊은 이승만씨가 1905년 독립청원서(하와이 교민회가 채택한 문서)를 들고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는 일화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하오이다.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씨가 1904년, 같은 해에 미국으로 건너간 윤병구씨와 함께 오이스터베이에 머물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것은 이듬해 8월 4일이었소이다. 그러나 들고 간 문서는 주미 한국공사관을 거쳐 전달된 고종 황제의 친서도 아니고, 루스벨트로서는 공식적으로 접수할 수 있는 문건도 아니었소이다. 루스벨트는 만일 그 문건이 정식 창구인 한국공사관을 통하여 전달된다면 접수하겠노라는 약속과 더불어 두 사람을 돌려보냈는데, 만난 시간은 30분이었다고 기록에는 남아 있소이다.
물론 한국인 두 사람을 만나주었다는 것만도 루스벨트로서는 호의를 베풀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로부터 나흘 전인 7월 31일에 이미 루스벨트는 태프트-가쓰라 간의 밀약을 승인하는 전보를 띄우지 않았소이까. 물은 벌써 엎질러져 있었던 것이지요.
앞서 글에서 깜빡 잊어먹고 빠뜨린 얘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루스벨트가 백악관으로 불러 점심을 같이하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운운한 일본인 가네코 겐타로는 루스벨트와는 하버드대학 동창이었다는 사실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이왕 얘기가 여기까지 온 김에 당시 아직 서른 살 나이의 젊은 이승만씨가 1905년 독립청원서(하와이 교민회가 채택한 문서)를 들고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는 일화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하오이다.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씨가 1904년, 같은 해에 미국으로 건너간 윤병구씨와 함께 오이스터베이에 머물고 있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것은 이듬해 8월 4일이었소이다. 그러나 들고 간 문서는 주미 한국공사관을 거쳐 전달된 고종 황제의 친서도 아니고, 루스벨트로서는 공식적으로 접수할 수 있는 문건도 아니었소이다. 루스벨트는 만일 그 문건이 정식 창구인 한국공사관을 통하여 전달된다면 접수하겠노라는 약속과 더불어 두 사람을 돌려보냈는데, 만난 시간은 30분이었다고 기록에는 남아 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