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2월 들어 거세진 이란의 반미·반팔레비왕 봉기 사태를 지켜보면서 한국의 박정희 독재정권에 미칠 영향과 미국의 우려를 예견한 필자의 투고문이 이듬해 1월 8일치 영문 시사주간지 <타임>에 실렸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83
미군이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한 이유는 틀림없이 프랑스를 구하고 나치스 독일을 치는 것이 그 목적이었소이다. 그런데 돌이켜보건대 그보다 1년 3개월 뒤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거꾸로 일본을 구하고 조선을 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소이다. 그들은 해방군이 아니었고, 6·25 전쟁 역시 한반도 전역을 옛 종주국 일본에 떠넘기려는 또 하나의 월남전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 내가 걸어온 구절양장의 기나긴 인생행로의 얘기를 펼치다 보니 1905년 서른 살 나이의 젊은 이승만씨가 미-일 간에 어떠한 뒷거래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순진하게 일본을 막아달라는 ‘독립청원서’를 들고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는 데까지 이르렀소이다.
이 얘기를 어디서 종결시켜야 될는지 아직 끝이 보이지 않으나, 내가 89년 3월 문익환 목사를 모시고 평양엘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독자들도 궁금할 것이고, 이 자서전에서는 뺄 수 없는 부분인데, 그 얘기를 털어놓기 위해서는 그 전에 87년 6월 민중항쟁, 80년 5·18 광주항쟁, 그리고 79년 박정희 암살극과 짧게 끝난 80년 ‘서울의 봄’ 얘기를 거치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 우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권총을 들이댔을 때의 세계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이에 대한 내 판단에서부터 얘기의 실마리를 풀었으면 하는 바이외다.
79년과 이듬해인 80년은 참으로 어수선하고 또 비극적인 해가 아니었소이까. 10월 26일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지듯 박정희가 권총을 맞고 암살되었는가 하면, 12·12 사건으로 신군부에 의한 권력 장악이 알려지고, 해가 바뀌자 2월에는 김대중·윤보선 등에 대한 복권조처로 ‘서울의 봄’이 잠깐 얼굴을 비치는가 했더니, 곧이어 피비린내로 광주를 뒤덮은 ‘5·18’이 일어나고, 11월 김대중씨가 내란음모죄로 체포되어 일본에 있는 반국가단체 ‘한민통’의 수괴였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는 등 엄청난 사건이 꼬리를 물고 발생하지 않았소이까. 그때까지 김대중씨의 일본 내 활동에 관해서는 일체 불문에 부쳐왔는데 왜 별안간에 ‘한민통’과 관련된 ‘반국가활동’이 문제로 부상하게 된 것인지, 본국에 계신 분들에게는 납득이 잘 가지 않았을 것이며, 더구나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의 뜻을 멀리 떨어져 있는 이란의 사태와 연결해 파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고 믿는 바이외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박정희의 한국과 팔레비의 이란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서로가 꼭 닮은 쌍둥이 국가가 아니오이까.
팔레비는 미국을 등에 업고 비밀경찰 사바크(SAVAC)를 동원하면서 이른바 근대화를 위한 백색혁명을 빌미로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던 독재자가 아니었소이까.
박정희 역시 미국을 등에 업고 비밀경찰인 중앙정보부(KCIA)를 동원하면서 이른바 근대화를 위한 유신혁명을 빌미로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던 독재자였다고 하면, 한국의 박정희와 이란의 팔레비가 서로 쌍둥이와 같은 존재였다는 것은 알만한 노릇이 아니오이까.
더구나 팔레비는 이란의 석유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앵글로-이란이라는 석유회사를 국유화했다는 ‘죄’로, 53년 미국이 미는 쿠데타 정권에 의해 일단은 사형을 선고받았던 모사데크의 실각 뒤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이란인들의 내셔널리즘을 짓밟은 반민족 분자였는데, 박정희 역시 4·19 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정권을 총칼로 붕괴시킨 뒤 미국과 더불어 일본 군국주의세력의 비호로 집권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내셔널리즘을 짓밟은 자가 아니오이까.
이란에서 일어난 격렬한 반미, 반팔레비 운동의 폭풍 속에서, 팔레비 왕이 가족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망명길에 오른 것이 79년 1월 16일이었고, 이와 엇갈리듯이 호메이니가 망명지 파리로부터 테헤란으로 돌아온 것이 2월 1일이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시작된 호메이니 혁명의 불길 속에서 사바크의 부장 나시리 장군 이하 4명의 측근이 처형된 것이 팔레비가 국외로 떠난 지 꼭 한달 만인 2월 16일이었소이다.
그 당시 내가 국외에서 이란 정세를 내다보면서 호메이니 혁명이 장차 한국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는지 구체적으로 그 양상을 짐작하고 있던 것은 아니나, 그해 1월 8일 영문주간지 <타임>(TIME)에 실린 나의 투고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소이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팔레비의 이란은 앞으로 올 박정희의 한국일 터인데, 내 귀에는 벌써 워싱턴 당국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다. “박을 어떻게 해야 되나?” “다른 뾰족한 수는 없는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팔레비의 이란은 앞으로 올 박정희의 한국일 터인데, 내 귀에는 벌써 워싱턴 당국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다. “박을 어떻게 해야 되나?” “다른 뾰족한 수는 없는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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