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민중혁명으로 팔레비 국왕이 이집트로 쫓겨가고 호메이니가 귀국하자마자 이란의 중앙정보부, 사바크의 팔레비 측근 4명은 처형당했다. 오른쪽 사진은 사바크의 부장이었던 나시리 장군의 처형 직전 모습, 왼쪽 사진은 왼쪽부터 나시리·라히미(테헤란 계엄사령관)·나지(이스파한지구 군정장관)·스로라도(낙하산부대 사령관)의 주검.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84
1979년 2월 1일, 민중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 호메이니가 망명지 파리로부터 테헤란으로 돌아오자, 그것을 계기로 일어난 혁명의 불길 속에서 2월 16일 이란의 중앙정보부 사바크의 부장 나시리 장군 이하 팔레비의 측근 네 사람이 무참하게 처형당했다는 것은 앞글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여기 제시한 사진을 눈여겨봐 주었으면 하오이다.
오른편 수인번호를 가슴에 단 이가 처형 직전의 나시리 장군이외다. 왼편에 보이는 네 사람의 주검은 첫째가 나시리, 다음이 인민봉기 중의 테헤란 계엄사령관 라히미, 셋째가 이스파한 지구의 군정장관 나지, 제일 끝에 누워 있는 것이 낙하산부대 사령관 스로라도이외다. 이 사진을 본 순간 한국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느꼈을 경악과 공포는 대강 짐작이 가지 않소이까.
김재규는 차지철과 같은 무지막지한 무뢰한은 아니었고, 고등학교의 교원직을 거쳤다는 경력으로 보아 이 사진이 보여주는 나시리의 오늘의 참상이 곧 내일의 자기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쯤, 머리 속에서 그릴 수 있는 ‘문학적 상상력’은 있었던 것 아니겠소이까. 김재규는 지금 ‘박정희’를 제거하고서 ‘박이 없는 박 체제’를 자기가 맡느냐, 그렇지 않으면 나시리와 같이 목숨을 잃고 핏기 없는 시체로 눕게 되느냐.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소이다.
미국은 또 미국대로 같은 장기판의 졸이나 상을 굴리듯이 한국과 이란을 한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세계제국으로서, 이란의 오늘이 곧 내일의 한국이라는 것쯤 왜 생각하지 않았겠소이까. 미국과 김재규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진 어느 순간이 있었다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소이까.
그렇다고는 하나, 김재규와 미국이 상호의 이해관계에서 일치점을 발견한 배후에, 숨막힐 듯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전개되고 있던 국내 정세를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고 믿는 바이외다.
우선 ‘박 체제’를 향하여 발사된 최초의 명중탄은 그해 5월 30일에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그때까지 박정희의 임명으로 야당 당수 노릇을 하고 있던 이철승씨를 11표 차로 물리치고 김영삼씨가 당수로 복귀하였다는 사실이외다.
그러자 박정희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씨에게 표를 던진 당원 중에 당원 자격이 없는 ‘가짜’가 22명 섞여 있었다는 이유로 신민당 안의 체제파를 시켜 서울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9월 8일 김영삼씨로부터 당수 권한을 박탈하는 조처를 취했소이다. 이른바 ‘토요일의 학살’이오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랐던지 박정희는 10월 4일 300명의 사복경찰을 동원해 야당 의원들의 접근을 배제하고서 여당인 유정회와 공화당만의 이름으로 김영삼씨로부터 의원 자격마저 박탈하는 극단적인 조처를 취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외다.
이런 사태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어떠한 것이었나? 우선 워싱턴 당국은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에 대한 항의를 표명하기 위해 10월 6일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의 본국 소환을 발표했는데, 그 사흘 뒤인 10월 9일에는 “태평양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방위선 안에 한국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놀라운 발언이 주일 미국대사 맨스필드의 입을 통하여 기자회견 석상에서 발표되었소이다. 일단 본국으로 송환되었던 글라이스틴 대사가 브라운 국방장관과 더불어 서울로 돌아온 것이 10월 17일이었는데 그때의 외신보도를 보면 브라운 국방장관은 박정희에 대한 카터 대통령의 친서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었소이다. 박정희를 사갈시하고 있던 카터 대통령이 국무부를 제치고 국방부 장관을 통하여 친서를 전달했다면, 앞서 말한 주일 미국대사 맨스필드의 발언으로 미루어 그 친서에는 박에 대한 거의 직접적인 협박이 담겨 있지 않았겠소이까. 또 브라운 장관이 서울에 도착한 10월 17일은 유신체제가 발족한 지 7년이 되는 날이었고, 이미 부산에서도 부마사태에 불이 붙어 있던 상태였으니 미국도 상당히 다급하지 않았겠소이까.
박정희가 총을 맞고 쓰러지기 바로 전날 김재규가 글라이스틴 대사를 만나 밀담을 나누었다는 소식이 모스크바로부터 날아들자 글라이스틴 대사는 펄쩍 뛰면서 “러비시”(황당무계)라느니, 또는 “벌로니”(사실무근)라는 말로 그것을 부정했는데, 그 현장을 보지 않은 이상 둘이 만났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으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김재규와 미국의 이해가 서로 맞아떨어진 어느 순간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 바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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