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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갑자기 온 ‘서울의 봄’…미국의 ‘어깃장’ / 정경모

등록 2009-08-30 18:24

1979년 11월 4일 호메이니혁명에 참여한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국대사관을 점령하고 외교관 52명을 인질로 잡고 있다.(위) ‘박정희 시해’ 이후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면서 이듬해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학생과 시민 10만여명이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아래)
1979년 11월 4일 호메이니혁명에 참여한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국대사관을 점령하고 외교관 52명을 인질로 잡고 있다.(위) ‘박정희 시해’ 이후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면서 이듬해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학생과 시민 10만여명이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아래)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85
일본에 있는 내가 박정희 암살의 제1보를 들은 것은 사건 다음날인 1979년 10월 27일 새벽, 아직 이불 속에서 코를 골고 있을 때였소이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에 잠이 깨어 눈을 비비면서 수화기를 들으니, 캐나다 토론토에서 <뉴 코리아 타임스>를 내고 있는 전충림씨 목소리예요.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박정희가 사살당했는데 아는가?”

알 까닭이 있었겠소이까. 아무튼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40분이었소이다. “아, 드디어….”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는 내 머릿속을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가더이다. 우선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아주머니, 인혁당 사건으로 남편 우홍선씨를 형장에서 잃고 “어디를 가면, 어디를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울부짖으며 <빼앗긴 자의 시>를 내게 보내셨던 강순희 아주머니, 와이에이치(YH)무역 사건 때 목숨을 잃은 김경숙양 등등.

마음을 가다듬고 배달되어 온 아침신문을 보니, 서울에 비상계엄령이 발포되었던 것이 오전 4시,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주한 일본대사관이 본국 외무부에 긴급전보를 띄운 것이 5시30분이었다니, 일본 안에서 5시40분이라는 시각에 박정희 암살을 알고 있었던 것은 나 말고는 없지 않았나, 얄궂은 쾌감이 느껴지더이다.

그런데 또 기묘한 것은 워싱턴에서는 도쿄시각 오전 3시(워싱턴시각 오후 1시)의 시점에서 브레진스키 백악관 특별보좌관 이하 각 각료가 카터 대통령이 주재하는 긴급회의에 모여들어 “외부 간섭에 대해서는 조약의 의무에 따라 대항조처를 취할 것”이라는 평양을 겨냥한 성명을 발표했다는 사실이었소이다. 도쿄시각 3시라면 서울에는 아직 비상계엄령이 발표되기 1시간 전인데, 미국의 이런 민첩한 행동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겠소이까?

일을 치르고서 만일 김재규가 육군본부가 아니라 남산 중앙정보부(KCIA) 본부로 갔더라면, 혹은 소문대로 육본 벙커에서 군 수뇌부를 앞에 놓고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라는 경솔한 실언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을지도 모르겠으나, 하여간 김재규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체포됨으로써 김재규 자신은 물론, 12·12를 거쳐 권력자로 부상하게 되는 전두환 자신 꿈도 꾸지 않았던 방향으로 역사는 전개되어 갔소이다.

그 후 김대중씨 등에 대한 복권 조처도 이루어지고 ‘서울의 봄’도 찾아온 것인데, 그 ‘서울의 봄’에 대해서 미국 사람들이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틀림없는 사실이었소이다.

민주주의를 떠들어대고 있는 학생 녀석들은 “버릇없이 자란 망나니들이다”(spoiled brats)라고 한 것은 당시의 주한 미국대사 워커의 발언이었고, 한국인이란 이게 너희들의 지도자라고 누군가가 목에다 방울이라도 달아주면 “무조건 따라가는 들쥐(lemmings)들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을 한 사람은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이었소이다. 들쥐 운운하는 위컴 발언은 이미 자기네들은 한국의 지도자로서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그것은 절대로 김대중은 아니라는 것을 터놓고 한 말인데, 김대중씨 자신은 그때 위컴의 발언을 어느 정도 새겨듣고 있었는지 지금도 궁금하오이다.

‘서울의 봄’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5·18 사태가 광주를 덮쳤을 때, 많은 사람들은 경악하고 공포에 떠는 한편 의아심을 느꼈으리라 믿는 바이외다. 신군부 세력이 민중민주 진영에 적의를 품고 있는 것은 알 만도 하나, 왜 하필이면 광주인가? 왜 김대중씨일까? 광주 사태와 수만리 밖의 테헤란 사태를 통시에 내다보면서 정세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요.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호메이니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음이 격앙되어 있던 테헤란의 이란 학생들이 미국대사관을 덮치는 동시에 대사관 직원 52명을 인질로 잡은 것은 박정희 암살 직후인 그해 11월 4일이었소이다. 인질들이 444일이라는 장기간의 감금생활을 견딘 끝에 풀려나온 것은 카터의 임기가 끝나고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식이 거행된 81년 2월 20일이었으니, 이란과 한국을 한 장기판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열광적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있는 한국 학생들의 움직임이 얼마나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었겠소이까.

그뿐만이 아니지요. 호메이니는 망명생활을 하면서 미국이 지지하는 팔레비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한 사람이 아니오이까. 그렇다면 김대중은 누구이오이까. 국외에서 망명을 선언하고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박정희 정권의 타도를 주장했던 인물이니, 미국 사람들 눈에 김대중은 한국의 호메이니라는 뜻에서 ‘김메이니’쯤으로 비쳤을 가능성은 없었겠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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