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3월 18일 ‘미국의 광주 유혈진압 방조와 군부독재 비호’에 항의하는 고려신학대 학생들의 기습 점거와 방화 시위로 부산 미문화원이 불타고 있다.(왼쪽) 사건을 주도한 문부식(오른쪽)씨를 비롯한 관련자 15명이 구속돼 사형 등 중형을 받았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87
왜 하필이면 광주인가. 왜 김대중인가. 왜 ‘한민통’이었나. 이상 세가지 질문에 덧붙여 왜 하필이면 ‘5·18’이었나? 이 네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겠소이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된 것은 1980년 5월 13일이었고, 그 열기가 절정에 달해 서울역 광장에 10만명의 군중이 모여든 것은 15일이 아니었소이까. 바로 그때 테헤란의 미국대사관이 이란 학생들에게 점거되고 직원 전원이 인질로 잡혀 있었는데, 서울역 광장에서 정동 미국대사관까지는 ‘와~’ 몰려서 뛰어간다면 10분도 채 안 걸릴 거리가 아니오이까. 서울역 광장을 지켜보는 미국대사관 직원들의 심정은 불문가지, 묻지 않아도 알 만하지 않소이까. 전두환 신군부에 시동이 걸린 것은 그때였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 바이외다. <광주백서>는 말하고 있었소이다. 시민들에게 그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것은 전두환의 군대일망정, 그 배후세력은 미국이었다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지만,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광주’는 참으로 역사적인 전환점이었는데, 그러한 극적인 변화를 가시적인 형태로 보여준 것이, 82년 3월 18일 부산 미국문화원(USIS)에다가 기독교 신학생인 문부식군 들이 불을 질렀다는 전대미문의 춘사였소이다. 미문화원이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은 그것이 우리나라에 대한 문화적 침략의 아성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 사건의 주동자인 문부식군이 친미반공의 색채가 유달리 농후한 부산 고려신학대학의 학생이었다는 사실이었소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신학대학의 창설자는 ‘친미반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숭미증북’(崇米憎北)이라고 할 만한 월남 기독교인의 중심 인물인 한경직 목사였으니 말이외다.
50년대 초 내가 아직 미군 군복을 입고 판문점에서 일을 보고 있을 무렵인데, 무슨 까닭인지 한경직 목사가 꽤 자주 거기를 드나들어요. 한 목사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한 목사의 얼굴을 알지 않소이까. 장교식당에서 그와 맞부딪칠 때마다 의아스럽게 느끼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한 목사는 제주도 4·3사건 때부터 미군의 고문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25만 도민 가운데 8만이 학살당했다는 그때의 사건으로 한 목사는 스스로의 손을 학살당한 사람들의 피로 더럽혔다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작가 황석영이 쓴 실록소설 <손님>이라는 것이 있소이다. 황해도 신천에 있는 ‘미제양민 학살 박물관’의 실상을 폭로한 소설인데, 6·25 전쟁 때 미제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는 3만5038명의 양민은 미군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만행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폭로하고 있소이다. 이따위 짓을 저지르고 나서 시침 뚝 떼고 38선을 건너와 가장 경건한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면서 일생을 살아온 이른바 ‘월남 기독교인’의 하나가 한경직 목사가 아닐까 하는데, <손님>의 일본어판은 나의 번역으로 2004년 4월 이와나미에서 출판되었소이다. 이 소설의 원어판이 창비사에서 출판된 것이 2001년 6월이었으니, 문부식군이 적어도 소설 <손님>이 폭로하고 있는 월남 기독교인들의 실태를 알고 있었을 리는 없었을 것이나, 그는 옥중서한에서 자파 기독교회가 ‘악의 편에 서서 이승만 정권 이래의 역대 독재정권을 옹호해 온 추태’를 규탄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 전두환이 주최하는 조찬기도회에 가서는 ‘하늘이 베풀어주신 이 나라의 지도자에게 축복을 내려 줍시사’고 기도하는 한경직 목사를 ‘그리스도를 배반한 패덕한’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던 것이외다.
그런데 문부식군에게 ‘방화죄’로 사형이 선고되자 ‘와~’ 하고 일어나 문군을 옹호하는 한편, ‘광주’의 배후세력인 미국에 대해 격렬한 규탄의 화살을 날린 것은, 의외로 신구 기독교 단체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였소이다. 박형규 목사, 김경락 목사, 조화순 목사, 지학순 주교, 김승훈 신부, 함세웅 신부 등 42명으로 구성된 협의회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를 발표하고 미국을 규탄하는 동시에, 한국 학생들을 ‘버릇없는 망나니들’이라고 부른 주한 미대사 워커와, 한국인들을 ‘들쥐’에다 비유한 주한 미군사령관 위컴의 추방을 요구하였소이다.
해방 후 미군이 들어오고 감리교인인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이로써 우리 한국은 주기도문이 말하는 ‘하늘이 임하신’ 나라로 믿고, 4·19 때 학생들이 총을 맞고 쓰러져 가는 것을 보면서도 학생들의 요구가 무엇인지조차 이해를 못했던 것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었소이다. 그 기독교인들이 깜짝 놀라 눈을 뜬 것은 ‘광주’가 준 충격 때문이었다고 나는 믿는 바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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