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만주괴뢰국 건설을 주도한 ‘우익의 원조’ 기시 노부스케.(왼쪽) 패전 이후 에이급 전범으로 구속됐으나 유일하게 풀려난 그의 ‘옥중일기’에는 ‘케넌 설계도’와 일치하는 한반도 재지배 구상이 담겨 있다. 한-일 수교 때 일본 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오른쪽)가 친동생이고, 2006~2007년 총리를 지낸 아베 신조는 그의 외손자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89
전후 미국의 극동정책이 ‘케넌 설계도’에 따른 것이었다면, 응당 대일정책에도 이에 따른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을 것인데, 내가 이에 관해 줄곧 주목해 왔던 인물이 기시 노부스케였던 것이외다.
진주만 폭격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 이하 일곱명의 에이(A)급 전범이 도쿄 스가모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것이 1948년 12월 23일이었는데, 극동재판에서 똑같이 에이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기시는 처음부터 기소조차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조 등이 처형된 다음날 자유의 몸으로 옥문을 빠져나와 당시 요시다 내각 관방장관으로 있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일본 총리)의 관저로 직행했소이다. 그날 저녁, 기시는 미리 요청해 두었던 맛있는 참치회를 안주로 술을 먹으며 오랜만에 가족과 더불어 단란한 한때를 즐길 수 있었는데, 이는 일본인 사회에서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일화이거니와, 미군이 기시에게 베푼 이런 특전은 석방되던 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다는 점으로 보아 정치적으로도 특별한 뜻을 지닌 것이었겠는데, 미국이 기시에게 건 기대는 무엇이었겠소이까.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여 괴뢰 만주국을 창건한 것이 32년이었는데, 일본 상공성의 유능한 관료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기시가 만주국의 산업차장으로 발탁되어 부임한 것은 그 4년 뒤인 36년이었소이다. 당시 소련은 10월혁명 후 28년부터 제1차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시작하고, 이것이 끝나자 곧 이어 32년부터 실시한 제2차 5개년 계획의 결과로 철강·시멘트·기계공업 등의 분야에서 경제력 내지 전쟁수행 능력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외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전시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임무를 띠고 부임한 것이 기시였는바, 기시 노부스케는 당시 미쓰이, 미쓰비시에 다음가는 재벌이었던 닛산콘체른의 사장 아유카와 기스케를 만주로 불러들여 ‘만주중공업개발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당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총재로 있던 마쓰오카 요스케와 손잡고, ‘만주 3스케’로 불리던 작업팀을 구성하여, 단시일 내에 경제발전을 위해 상당한 성과를 올렸던 것이외다. 기시가 상공성 차관으로 귀임한 것이 36년이었으므로 그의 만주시대는 그리 길었던 것은 아니나, 만주는 ‘내 작품’이었노라고까지 호언하였다 하니 자기가 올린 성과에 대한 자부심은 알 만도 하지 않소이까.
그렇다면 말이외다,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만주에 이르는 일본의 구식민지를 일본의 재지배에 맡겨야 한다는 ‘케넌 설계도’의 시각에서 본다면, 기시는 미국으로서는 참으로 안성맞춤의 인물이 아니오이까.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의 요원이 패전 후 옥중의 기시와 빈번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기록에도 남아 있는 사실인데, 기시는 벌써 그때부터 미국이 자기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사실과 무죄석방 뒤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외다. 기시의 다음과 같은 ‘옥중일기’는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소이까.
‘냉전(Cold War)은 조만간 열전(Hot War)으로 변할 것인데, 비록 일본이 이번 전쟁에서 고배를 마셨다고는 하나 동양에서 으뜸가는 소질을 지닌 민족으로서 우리는 모름지기 스스로가 맡아야 할 세계사적 임무가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식견과 포부, 용기와 단행력을 겸비한 지도자는 누구일까, 그 출현이 기다려진다.’(1947년 9월20일)
이 글의 행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능력을 겸비한 인물은 바로 기시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 않소이까.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도 남겨 놓았소이다.
‘동아시아 전체의 적화를 몰고 올 중국 공산군의 제패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달러와 무기원조로만 장개석을 돕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미국은 미국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여 모택동을 제압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미국 자신의 군대라는 것은 일본의 의용군으로 편성하는 것이 타당하다.’(1948년 11월 4일)
앞서 글에서 나는 김일성이나, 모택동이나, 또는 스탈린의 시각에서 본다면 6·25전쟁은 비록 일본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망정 제2의 청일전쟁이요, 제2의 러일전쟁이었다고 말한 바가 있는데, 내가 왜 그런 말을 했겠는지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도 남겨 놓았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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