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 “국가사과·법원 재심하라” 권고
군법회의 피해자 일괄구제 특별법도 제안
군법회의 피해자 일괄구제 특별법도 제안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는 한을 푸셨을까요?”
4일 ‘진실·화해를 위한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보내 온 ‘최능진(사진)의 국방경비법 위반 사건’ 진상규명 결정문을 손에 쥔 아들 최만립(74)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진실화해위는 최근 이승만 정권 아래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한 ‘최능진 사건’에 대해 “최능진은 이승만에게 맞선 것을 계기로, 설치 근거도 없고 법관의 자격도 없으며 재판 관할권도 없는 재판부에 의해 사실관계가 오인된 판결로 총살됐다”며 유가족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법원의 재심 수용 등의 조처를 권고했다. 또 국회에는 1954년 개정 헌법에 의해 합법화되기 전까지 법적 근거 없이 운영된 군법회의 판결에 의한 피해자들을 일괄구제하는 특별법 제정을 제안했다.
최씨의 부친 최능진(1899~1951)은 일제 치하인 1937년 흥사단 계열의 민족운동단체인 ‘동우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 기독교·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다. 8·15해방 직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치안부장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9월께 월남한 뒤 미군정에 의해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됐다.
“부친이 미국 유학을 오래하셔서 영어를 잘했어요. 경찰 고위직에 오르고 나니까 눈앞에 친일파들이 밟히는 거야.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중해야 하는데’라는 말씀을 하시며 친일경찰 청산에 나선 거지. 그래서 크고 작은 갈등이 빚어졌어요.”
최능진은 친일경찰들의 견제에 밀려 결국 ‘파면’됐고, 이승만의 독주를 막기 위해 1948년 5월10일 제헌의회 선거에서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 갑구에 도전장을 낸다. 선거가 시작되자 최능진의 독립운동 경력 등이 부각되며 이승만의 당선을 위협하는 ‘정적’으로 부각됐다고 한다. 그러자 돌연 후보등록이 취소됐고, 그해 8월15일 정부 수립 이후 한달 반만에 “국군 안에 혁명의용군을 조직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전쟁이 터진 뒤 인민군 치하 서울에서 정전·평화 운동을 벌인 최능진은 결국 그 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그를 조사한 방첩대(CIC)는 일제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인 김창룡이 이끌고 있었다. 아들 최씨는 “피난 간 부산에서 초대 영국공사를 지낸 이묘묵 박사를 찾아갔더니, 그분이 울면서 1951년 2월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아버지가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했다.
평안도 강서군 출신인 최씨 집안 형제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팔을 걷고 나섰다. 최능진의 큰형 능찬(1881~1932·독립장 서훈)은 지역에서 3·1운동 주모자로 붙잡혔다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떴고, 작은형 능현(1887~1933·애족장 ˝)은 윤봉길 의사와 함께 폭탄 제조 실험을 하다 폭발 사고로 숨졌다.
최씨는 1993년 “부친을 독립운동가로 서훈해 달라”며 국가보훈처에 진정을 냈지만, “이적죄 등으로 처형된 경력이 있어 서훈은 불가하다”는 회신을 받았다. 최씨는 진실화해위의 결정문을 가리키며 “이제 남은 일은 아버지가 생전의 공을 인정받아 독립운동가로 서훈되는 것”이라고 간절한 기대를 나타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국사학)는 “최능진 사건은 친일파들이 민족주의자를 빨갱이로 몰아 죽인 전형적인 사례”라며 “하루빨리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최씨는 1993년 “부친을 독립운동가로 서훈해 달라”며 국가보훈처에 진정을 냈지만, “이적죄 등으로 처형된 경력이 있어 서훈은 불가하다”는 회신을 받았다. 최씨는 진실화해위의 결정문을 가리키며 “이제 남은 일은 아버지가 생전의 공을 인정받아 독립운동가로 서훈되는 것”이라고 간절한 기대를 나타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국사학)는 “최능진 사건은 친일파들이 민족주의자를 빨갱이로 몰아 죽인 전형적인 사례”라며 “하루빨리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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