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이래 한-일관계 막후 실력자이자 소설 <불모지대>의 실존 인물로 유명했던 세지마 류조 전 이토추종합상사 회장.(왼쪽) 1988년 9월1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서울올림픽 개막식을 참관하고 있다.(오른쪽)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95
1987년 6·29 선언 덕분으로 노태우가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되고, 또 그 노 대통령의 선언으로 88 서울올림픽이 화려하게 막을 올렸을 때, 운동권 사람들은 무언가 석연치가 않아 ‘6·29는 속이구’였구나 하는 한숨을 지었다고 들었소이다. 시인 고은씨도 아마 같은 심정이었겠지요. 언젠가 일본에 왔을 때 들려준 얘기인데, 자신은 88 올림픽이라는 것에 부아가 터지고 그 북적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 처음부터 전원을 끊어버리고 볼 생각조차 안 했다는 것인데, 그 88 올림픽 어디에 ‘속이구’가 감춰져 있었던 것인지 내가 본 견지에서 소감을 말해 볼까 하는 바이외다. 서울에서 열린 88 올림픽은 알고 보면 한국의 축전이 아니라, 실은 메이지 120년을 기념하는 일본의 축제였다고 내가 말하면 독자들은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나의 주장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인지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여기서 일본의 정계와 재계를 쥐락펴락하던 흑막(막후 실력자)적인 존재 세지마 류조라는 특이한 인물을 소개하겠는데, 그 당시 88 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 세지마였던 것이외다. 그때 올림픽 개최의 후보지로서 일본 나고야와 한국의 서울이 맞붙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나고야를 누르고 오히려 서울을 천거하는 데 힘을 기울인 세지마는 누구이고, 그 속셈은 무엇이었나? 세지마는 193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으며, 40년 육군대학도 역시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서 육대 졸업 뒤 잠시 일본군 대본영에서 근무하다가 만주로 파견되어 관동군 참모본부 작전과에 배속되어 있었으나, 45년 계급이 육군 중좌였을 때 외지인 만주에서 패전을 맞이했던 것이외다. 만주가 소련군에게 점령당해 포로가 된 세지마가 소련의 군용기로 하얼빈을 떠나 송화강을 북상하여 하바롭스크로 향한 것은 그해 9월 6일이었는바, 그때를 회고하면서 세지마는 “초가을의 바람이 가슴속으로 스며오는 중, 만주의 그 끝없는 벌판이 붉은 노을로 타오르는 광경을 기내 창밖으로 내다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실토하고 있는데(회고록 <기산하>), 그 패기만만한 엘리트 군인이 절치부심 이를 갈면서 언젠가는 권토중래하여 만주땅을 다시 한번 지배해 보겠다는 야망을 품지 않았겠소이까. 세지마가 11년 동안이나 시베리아에서 포로생활을 한 뒤에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56년이었는데, 그때는 이미 만주벌의 총수인 기시 노부스케가 정계로 돌아와 화려한 활동을 시작하고 있던 때였으니, 비집고 정계로 진출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요. 이토추라는 종합상사 평사원으로 입사한 것이 58년, ‘부대 속의 송곳’이라는 말마따나 그 예리한 끝으로 부대를 뚫고 두각을 나타내어 눈 깜짝할 사이에 일본의 재계와 정계를 주무르는 거물로 부상하게 된 것이오이다. 우선은 상사의 대표로 수카르노시대의 인도네시아 배상무역을 거의 독점하는 수완을 발휘함으로써 이토추의 중역으로 발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이어 65년 이후 ‘무상 3억달러·유상 2억달러’의 대한 경제원조 사업이 시작되자 세지마는 박정희와 일본 육사의 선후배 관계라는 점을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비단 한국의 재계뿐만 아니라 정계에 대해서조차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들어가는 데 성공한 것이었소이다. 또 그는 한국에서 이룩한 경제적·정치적 성과를 발판으로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일본 정계 침투를 시도하여 다나카 가쿠에이, 후쿠다 다케오, 미야자와 기이치,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등 역대 총리에게 이념적으로 또는 전략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적인 힘을 갖게 되는 것이외다.
박 정권의 대일 공작은 김종필과는 같은 8기생으로서 일본말이 유창한 최영택을 통하여 진행되었던바, 최영택이 김종필의 지시로 일본으로 파견되었을 때의 직함은 ‘주일 대표부 참사관’이었다고 하더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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