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 13일 평양~베이징~도쿄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익환(왼쪽) 목사와 유원호(오른쪽)씨가 나란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다. 실향민 출신인 유씨는 사업차 일본 출장 길에 인연을 맺은 필자의 요청으로 그해 1월1일 문 목사에게 북한 방문 제안을 전한 이후 평양길과 투옥 등 끝까지 행동을 같이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97
평양에 있는 연구씨가 선친 몽양 선생 추모회에 보내는 전보가 시부야에 있는 ‘씨알의 힘’ 내 사무소로 배달되어 온 것은 그날(1988년 7월 19일) 오후 4시. 그러니까 오후 6시로 예정되어 있던 개회 시간을 2시간 앞둔 시각이었소이다.
우리말을 알파벳 로마자로 표기한 것이어서 읽기가 쉽지 않았으나, 서둘러 해독을 끝내고서 그것을 들고 행사장인 이치가야 아르카디아 회관으로 뛰어가, 벽두에 청중 앞에서 그것을 낭독하였소이다. 모두들 감동했지요. 또 그 전문은 총련을 통해서 전달된 것이 아니고, 일본의 민간 통신사인 케이디디(KDD)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었으며, 한국 사람인 내가 평양으로부터 상업통로를 통해 전달받은 최초의 전보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문건이기 때문에 그 전문을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바이외다.
‘존경하는 정경모 선생,
선생이 일본에서 저의 선친을 추모하는 모임을 조직하신다는 소식에 접하여 깊은 감동을 가지고 선생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함과 아울러 원로의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모임에 참석하신 남조선의 민주 인사들을 비롯하여 고명하신 내외 인사들에게 충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민족분단의 비운이 더욱 무겁게 드리우고 있는 이때에 여러분들이 마음과 힘을 합쳐 이번에 작고하신 저의 선친 추모회를 여는 것에는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이 나라의 모든 선열들이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않고 구국을 위한 그분들의 뜻을 기어이 성취하려는 뜨거운 애국충정과 의리의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통일구국의 성스러운 길에 한 몸 바친 유명무명의 열사들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게 될 이번의 7·19 추모회는 자주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남조선의 애국자·민주인사·청년학생들에게 힘과 용기와 투지를 북돋워 주는 하나의 계기로 될 것입니다.
끝으로 나는 정 선생과 함께 참석하신 여러분들의 건강과 남조선 사회의 자주화·민주화·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서 성과있기를 기원합니다.
1988년 7월 18일 여연구’
그런데 추모회가 끝나고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한잔씩 걸치는 자리에서 여러차례 평양에도 다녀왔고 해서 그쪽 사정을 잘 아는 상공인 전진식씨가 그 전보를 좀 보여달라고 하기에 보였더니 한참 들여다보던 그가 약간 놀란 기색으로 말을 하더이다. “정 선생, 이건 연구씨 이름으로 온 것이지만 실제로 이 전보를 친 분은 김일성 주석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묻지 않았겠소이까. “김 주석이 내게 이 전보를 보내셨다는 말입니까?” “그짝 사정으로 보아 이런 전문을 보낼 수 있는 분은 김일성 주석 이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전보를 읽어보면서 역시 전진식씨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섣불리 그걸 외부에다 대고 떠들어 댈 수도 없고 한동안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두었을 뿐이었소이다. 그러고 나서 88올림픽의 그 요란스러운 소음을 들으면서 속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외다. 그러면서 김대중씨가 헛다리를 짚는 바람에 정권을 노태우에게 가로채이고, 또 그 88올림픽 소동으로 모두들 정신이 들떠 있는 한편에서,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문익환 목사의 모습이 떠오릅디다. 그리고 홱, 머리를 스쳐 가는 것이 있어요. 문 목사를 평양으로 모시고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게 하는 거다. ‘형님, 6·29 속임수에 대해 한 방 멋있게 먹이는 길은 이 길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입으로 혼자서 중얼거리면서도, 그럼 무슨 수로 문 목사를 설득하나, 연락을 어떻게 취하나, 그것이 문제였지요. 이쯤에서 결국 평양 가는 길에 동행하게 되는 유원호씨를 등장시켜야 할 차례가 된 것 같은데, 그는 사업 관계로 자주 일본을 드나들고 있었으며, 그때마다 사무소로 나를 찾아오곤 했소이다. 문 목사와 어떻게 연락을 취하나, 혼자서 궁리에 잠겨 있던 차인데 유원호씨가 나타났소이다.
유원호씨를 앉혀 놓은 자리에서 곧 붓을 들어 그리 길지 않은 짤막한 편지를 썼소이다.
“평양엘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십시오. 그쪽에서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입니다.”
물론 그 편지에는 김 주석이 만나줄 것이라는 증거로 연구씨의 전문이 동봉되어 있었구요.
이렇게 해서 문 목사에 대한 ‘설득 공작’이 시작된 것이었는데, 그때 유원호씨에게는 편지 내용을 알리지 않았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런데 추모회가 끝나고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한잔씩 걸치는 자리에서 여러차례 평양에도 다녀왔고 해서 그쪽 사정을 잘 아는 상공인 전진식씨가 그 전보를 좀 보여달라고 하기에 보였더니 한참 들여다보던 그가 약간 놀란 기색으로 말을 하더이다. “정 선생, 이건 연구씨 이름으로 온 것이지만 실제로 이 전보를 친 분은 김일성 주석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되묻지 않았겠소이까. “김 주석이 내게 이 전보를 보내셨다는 말입니까?” “그짝 사정으로 보아 이런 전문을 보낼 수 있는 분은 김일성 주석 이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전보를 읽어보면서 역시 전진식씨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섣불리 그걸 외부에다 대고 떠들어 댈 수도 없고 한동안 책상 서랍 속에 넣어 두었을 뿐이었소이다. 그러고 나서 88올림픽의 그 요란스러운 소음을 들으면서 속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외다. 그러면서 김대중씨가 헛다리를 짚는 바람에 정권을 노태우에게 가로채이고, 또 그 88올림픽 소동으로 모두들 정신이 들떠 있는 한편에서,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문익환 목사의 모습이 떠오릅디다. 그리고 홱, 머리를 스쳐 가는 것이 있어요. 문 목사를 평양으로 모시고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게 하는 거다. ‘형님, 6·29 속임수에 대해 한 방 멋있게 먹이는 길은 이 길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입으로 혼자서 중얼거리면서도, 그럼 무슨 수로 문 목사를 설득하나, 연락을 어떻게 취하나, 그것이 문제였지요. 이쯤에서 결국 평양 가는 길에 동행하게 되는 유원호씨를 등장시켜야 할 차례가 된 것 같은데, 그는 사업 관계로 자주 일본을 드나들고 있었으며, 그때마다 사무소로 나를 찾아오곤 했소이다. 문 목사와 어떻게 연락을 취하나, 혼자서 궁리에 잠겨 있던 차인데 유원호씨가 나타났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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