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 “심문규씨 위장자수 몰아 처형”
유족에 사과…재심 등 명예회복 조치 권고
유족에 사과…재심 등 명예회복 조치 권고
“그동안 아버지 없는 삶이 너무 힘들어서…. 불쌍한 아버지와 저희 삼남매의 삶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나요?”
군법회의에서 ‘이중간첩’으로 몰려 육군교도소에서 처형당한 ‘북파 공작원’ 심문규(사진)의 아들 심한운(59)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15일 ‘북파공작원 심문규의 이중간첩사건’을 조사한 결과 “육군첩보부대(HID)의 사건 조작으로 무고한 사람이 처형당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가족에 대한 사과와 재심 수용 등 필요한 조처를 하라고 국가에 권고했다.
심씨의 부친 심문규의 인생은 일제 식민지배와 전쟁, 분단으로 이어지는 굴곡진 한국사의 축소판이라 부를 만하다. 심문규의 고향은 철원으로, 한국전쟁 뒤 휴전선이 그어지기 전까지 북한의 땅이었다.
평소 남한에 호의적이던 심문규는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뒤 1950년 12월 국군 제6사단 수색대로 군에 입대해 첩보대 활동을 시작했다. 아들 심씨는 “부친은 해방 이전 일본군에 자원입대해 만주 관동군에 배속됐다가 소련·중국군의 포로 생활도 경험했다”며 “중국어는 물론 주변 지리를 잘 알아 첩보 업무에 제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 후 실업 상태에서 서울에 머물던 심문규에게 육군첩보부대(HID)에서 “다시 일해볼 생각이 없냐”고 제의를 해왔다. 결국, 심문규는 1955년 9월 아내와 삼남매를 남기고 동해안을 통해 북파됐다. 심씨는 “당시 군에서 아버지께 ‘돌아온 뒤 장교 대우를 해주겠다’ 회유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심문규는 임무수행 중 북한군에 붙들렸고, 이번엔 1년 7개월 동안 대남 간첩교육을 받은 뒤 요인 암살 등의 임무를 받고 남파됐다. 서울에 가족들이 있는 심문규는 남한으로 넘어오자마자 첩보대에 자수했지만 당시 군검찰 등은 심씨를 ‘위장 자수자’로 몰아 1961년 5월 대구교도소에서 처형했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당시 군 고위층한테 심씨처럼 살아 돌아온 북파공작원들은 사회에 내보내기엔 곤란하고도 귀찮은 존재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이후 가족들은 고된 삶을 살았다. 심씨는 “어머니는 부친이 북파되기 직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둘째는 다섯살에 병으로 숨졌다”고 말했다. 막내는 다른 집에 양자를 보내야 했고, 심씨 자신도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심씨는 북파공작원들의 지난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뒤 보상을 신청했지만 기각 판정을 받았다. 심씨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법원에 재심을 신청하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내겠다”고 밝혔다.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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