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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배짱으로 밀어붙인 ‘문 목사 방북 준비’ / 정경모

등록 2009-09-16 18:50

1988년 12월 15일, 첫번째 평양 방문을 하루 앞둔 필자와 방북 취재를 추진하고자 도쿄를 방문한 리영희 당시 <한겨레신문> 논설고문은 저녁을 함께 했으나 서로 계획을 밝히지 않았다. 이듬해 4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공안합수부에 의해 구속된 리 고문이 8월 1차 공판 법정에 들어서며 임재경(오른쪽) 편집인의 격려를 받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12월 15일, 첫번째 평양 방문을 하루 앞둔 필자와 방북 취재를 추진하고자 도쿄를 방문한 리영희 당시 <한겨레신문> 논설고문은 저녁을 함께 했으나 서로 계획을 밝히지 않았다. 이듬해 4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공안합수부에 의해 구속된 리 고문이 8월 1차 공판 법정에 들어서며 임재경(오른쪽) 편집인의 격려를 받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98




그런데 역시 문 목사께서는 이해가 빠른 분이셨소이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평양엘 가야 되는 것인지 내가 드리는 말씀을 거의 직각적으로 알아들으시더군요.

유원호씨를 통한 연락문이 두어 차례쯤 왔다 갔다 한 뒤에 문 목사께서는 결심을 내리신 것이었소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붙여 오셨어요.

“그래 가마. 그렇지만 내가 평양엘 가면 틀림없이 김 주석을 만날 수 있다는 보증이 없지 않은가. 공연히 평양까지 갔다가 옥류관 냉면이나 한 그릇 얻어먹고 헛걸음을 치게 된다면, 나 개인으로서의 체면도 체면이려니와, 한국 민주화세력의 꼬락서니가 어떻게 되겠나. 그러니 자네가 먼저 평양엘 가서 김 주석이 꼭 만나 주겠다는 보증을 받아 오게.” 그런 식의 회답을 유원호씨를 통해 보내오셨소이다.

그래서 비로소 유원호씨에게는 그동안 오갔던 통신문의 내용을 밝히고서, 되도록 속히 내가 평양으로 출발하겠으니 준비를 서두르시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그때는 구두로 전갈을 부탁하였소이다. 유씨도 그때에야 일의 중대성을 깨닫고 긴장하면서, 다음날 서울로 떠났던 것이외다.

그런데 그동안 문 목사에게 그런 내용의 전갈을 전해 놓고서도 그때까지 평양에다 대고 문 목사를 모시고 갈 예정이니 맞이할 준비를 부탁한다는 말을 전혀 전해둔 일이 없었던 것이외다. 일종의 똥배짱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처음에는 총련 중앙에 정식으로 요청하고 연락을 취할까도 생각했으나 그건 안 되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소이다. 총련 중앙에다 부탁하게 되면 비밀이 한민통으로 새어나갈 위험이 따르고, 비밀이 새어나간다면 틀림없이 한민통 사람들은 방해공작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소이다.

그래서 내가 따로 전화를 걸어 좀 만나자고 연락을 취한 분이, 그때 무슨 일로 총련 중앙에서 말하자면 좌천을 당해 지역인 지바현 본부 위원장으로 나가 있던 전호언 동지였소이다.

전 동지는 사회당 국회의원 도이 다카코의 비서 고토 마사코의 소개로 만난 분이고, 내가 한민통에서 추방당했을 때의 사정도 대강은 짐작하고 있어 비밀이 새나갈 위험이 없을뿐더러, 평양과도 일정한 연락의 통로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소이다.


전 동지에게는 처음부터 다 털어놓고 사정을 설명하였소이다. ‘87년 6월 민중항쟁의 열기가 사그라져버린 이때 그 열기를 다시 한번 불러일으켜 민족·민주화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문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나 두 분께서 민족의 나아갈 길을 남북 겨레에게 제시하는 이외에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우선은 내가 먼저 평양을 방문하고 저쪽의 의향을 타진할 필요가 있으니 길을 열어 주도록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

전 동지는 문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 김 주석을 만난다는 것의 역사적인 의의를 직각 이해해 주었소이다. 나는 전 동지가 무슨 수단을 구사했는지까지는 묻지도 않았고, 또 알 필요도 없었으나 일주일이 채 안 가서 기다리고 있던 회답을 내게 전해 왔습디다. 문 목사의 방북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며, 그 준비 절차의 선도를 위하여 정경모가 오는 것을 기다리겠으니, 언제 도쿄를 출발하겠는지 날짜를 알려라. 베이징까지 안내원을 파견하마. 이렇게 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도쿄~서울, 그리고 도쿄~평양과의 연락이 척척 맞아떨어진 것이외다.

우선 베이징을 향하여 도쿄 나리타공항을 떠나는 날짜를 88년 12월 16일로 잡고서 유원호씨를 통해서 문 목사에게 출발 날짜를 알리고, 또 전호언 동지를 통하여 평양에도 출발하는 비행기 시간과 베이징 징룬호텔에 방을 예약했다는 사실을 알렸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떠나기 며칠 전 나는 전 동지를 불러서 그동안 수고해 준 것에 대한 치사를 겸해 한잔 푸짐하게 마셨소이다. 문 목사께서 평양을 방문해 김 주석과 무릎을 맞대고 민족의 갈 바를 의논한 끝에 7000만 겨레를 향하여 방향을 제시한다는, 참으로 역사적인 장면을 상상하면서 거나하게 취기가 돌고 있었던 것이나, 둘은 술뿐만 아니라 감격에도 취하고 있었을 것 아니오이까. 그날의 술값은 물론 내가 물 예정이었는데 의외로 전 동지가 어떻게 마련했는지 돈 40만엔을 내게 쥐여주면서 여비에 보태 쓰라고 하지 않소이까. 그것도 참 감동스러웠소이다.

그런데 진짜 드라마는 출발 전날인 12월 15일에 일어났소이다. 저녁 시간인데 <한겨레신문> 도쿄통신원 이주익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어요. 지금 방금 서울서 리영희 선생께서 도착해 만나자고 하시니 나오라고요. 다음날 아침 떠나려고 한창 분주하게 짐을 꾸리고 있는 판인데 말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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