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섯구름’ 상흔과 사투 불꽃삶 35년
한·일정부 상대 생존권 투쟁
내달 특별법 제정 씨 뿌리고… 원폭 피해자 2세의 권익을 위한 싸움의 맨 앞줄에 서서 한국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왕성하게 활동해온 한국원폭 2세 환우회 회장 김형율(35·사진)씨가 29일 오전 9시5분 부산시 동구 수정동 자택에서 숨졌다. 김 회장은 20일부터 사흘 동안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심포지엄에 다녀온 뒤 급속히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 가족들은 그가 이날 아침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졌으며,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숨졌다고 전했다. 그의 짧은 삶은 이름 모를 병마와 싸워야 했던 전반기와, 원폭 2세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뒤늦게 알고 반핵·인권·평화운동가로 나선 후반기로 나뉜다. 2기 삶의 시작은 31살 때인 2001년이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인 1983년 급성폐렴으로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원인 모를 병으로 삶의 고비들을 숱하게 넘어야 했다. 중학교 졸업 이후 검정고시를 거쳐 부산 동의전문대학을 나와 두 번 취직했다. 그러나 잦은 병치레로 한번은 6개월 만에, 또 한 번은 1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그는 95년에야 자신이 ‘선천성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병이 어머니로부터 유전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았다. 그의 어머니는 45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폭 방사능에 노출된 뒤 최근까지도 종양과 피부병 등 원폭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의 폐기능은 지난 몇 해 동안 30%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약간의 찬바람도 생명에 치명적이었다. 한여름에도 두터운 외투를 벗을 수 없었다. 그러나 40㎏도 안 되는 마른 몸에도 원폭 2세들의 인간다운 삶을 요구할 때는 단호한 목소리의 투사로 변했다. 의사가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의 상태에 빠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조금만 몸이 좋아지면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원폭 2세들에 대한 실태조사와 생존권 보장을 촉구했다. 그는 생전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아파서 입원할 때마다 지쳐가는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너무나 죄스러웠고, 인정받지 못하는 삶이 고통스러웠다”며 “내 문제는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고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의 노력은 2002년 원폭 2세 환우회, 이듬해 원폭 2세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 결성에 이어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의 원폭 2세들에 대한 실태조사로 이어졌다. 그가 그렇게 요구했던 ‘원자폭탄 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안’(가칭)은 다음달 임시국회에서 발의될 예정이다. 그가 숨지기 이틀 전에 보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전자우편 끝자락에는 평소 그가 즐겨 쓰던 문구가 들어 있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김씨의 주검이 안치된 부산대병원 영안실에는 이날 밤 늦게까지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진상규명위원회 최봉태 사무국장과 원폭피해자협회 관계자, 정신대 할머니를 위한 시민모임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30여명이 찾아 그의 뜻있는 삶을 기렸다. 김씨의 가족들은 애통함 속에서도 담담하게 김씨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형 김진곤(41)씨는 “동생이 끊임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 했기에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면서도 “짧은 삶을 살다간 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원폭 2세들에 대한 대책이 세워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례식은 31일 아침 8시30분, 부산대병원 영안실. (051)240-7843. 박영률 김남일 기자 ylpak@hani.co.kr
한·일정부 상대 생존권 투쟁
내달 특별법 제정 씨 뿌리고… 원폭 피해자 2세의 권익을 위한 싸움의 맨 앞줄에 서서 한국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왕성하게 활동해온 한국원폭 2세 환우회 회장 김형율(35·사진)씨가 29일 오전 9시5분 부산시 동구 수정동 자택에서 숨졌다. 김 회장은 20일부터 사흘 동안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심포지엄에 다녀온 뒤 급속히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 가족들은 그가 이날 아침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졌으며,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숨졌다고 전했다. 그의 짧은 삶은 이름 모를 병마와 싸워야 했던 전반기와, 원폭 2세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뒤늦게 알고 반핵·인권·평화운동가로 나선 후반기로 나뉜다. 2기 삶의 시작은 31살 때인 2001년이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인 1983년 급성폐렴으로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원인 모를 병으로 삶의 고비들을 숱하게 넘어야 했다. 중학교 졸업 이후 검정고시를 거쳐 부산 동의전문대학을 나와 두 번 취직했다. 그러나 잦은 병치레로 한번은 6개월 만에, 또 한 번은 1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그는 95년에야 자신이 ‘선천성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병이 어머니로부터 유전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았다. 그의 어머니는 45년 일본 히로시마에서 원폭 방사능에 노출된 뒤 최근까지도 종양과 피부병 등 원폭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의 폐기능은 지난 몇 해 동안 30% 정도만이 남아 있었다. 약간의 찬바람도 생명에 치명적이었다. 한여름에도 두터운 외투를 벗을 수 없었다. 그러나 40㎏도 안 되는 마른 몸에도 원폭 2세들의 인간다운 삶을 요구할 때는 단호한 목소리의 투사로 변했다. 의사가 고개를 가로저을 정도의 상태에 빠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조금만 몸이 좋아지면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원폭 2세들에 대한 실태조사와 생존권 보장을 촉구했다. 그는 생전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아파서 입원할 때마다 지쳐가는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너무나 죄스러웠고, 인정받지 못하는 삶이 고통스러웠다”며 “내 문제는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유하고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의 노력은 2002년 원폭 2세 환우회, 이듬해 원폭 2세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 결성에 이어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의 원폭 2세들에 대한 실태조사로 이어졌다. 그가 그렇게 요구했던 ‘원자폭탄 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안’(가칭)은 다음달 임시국회에서 발의될 예정이다. 그가 숨지기 이틀 전에 보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전자우편 끝자락에는 평소 그가 즐겨 쓰던 문구가 들어 있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김씨의 주검이 안치된 부산대병원 영안실에는 이날 밤 늦게까지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진상규명위원회 최봉태 사무국장과 원폭피해자협회 관계자, 정신대 할머니를 위한 시민모임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30여명이 찾아 그의 뜻있는 삶을 기렸다. 김씨의 가족들은 애통함 속에서도 담담하게 김씨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형 김진곤(41)씨는 “동생이 끊임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 했기에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면서도 “짧은 삶을 살다간 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원폭 2세들에 대한 대책이 세워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례식은 31일 아침 8시30분, 부산대병원 영안실. (051)240-7843. 박영률 김남일 기자 ylp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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