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평양 방문 이틀째인 1989년 12월 18일 필자(오른쪽)가 고려호텔 티룸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의 둘째딸로 필자에게 편지를 보냈던 여연구(왼쪽) 당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과 커피를 마시며 회포를 풀고 있다. 이후 조통연합 북측본부 부의장으로 서울도 방문했던 여씨는 1996년 9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00
1988년 12월 17일 평양에 도착해 내가 안내를 받고 들어간 초대소는 40층짜리 살림집(아파트) 위에 있었는데, 살림집과는 드나드는 문도 다르고 오르내리는 승강기도 별도로 설치되어 있는 관계로, 살림집 사람들과는 서로 얼굴이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설계되어 있는 구조였소이다. 내가 초대소로 들어가자 강주일이라는 분이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강 동지는 말하자면 김일성 주석의 특별비서관이어서, 나중에 보니 식사회 때에도 늘 김 주석 옆자리에 앉아 시중을 들고는 하더이다. 그때 강 동지가 들려준 얘긴데, ‘주석께서는 정 선생이 <세카이> 같은 데 쓰고 있는 글은 거의 다 번역을 시켜 읽고 계시다’는 것이어서 약간 놀라기도 하였소이다. 얼마 안 있어 식사 시간이 되어 옆방 식당에서 강 동지와 둘이서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그때 상에 놓인 밥의 밥알이 짜르르 기름기가 흘러 불빛을 반사하리만치 희한하게 먹음직스러웠소이다. 그 밤에 김치와 된장국이 있고 자반고등어가 곁들여져 있으니, 다른 요란스런 반찬이 없다 해도 얼마든지 입맛을 다시면서 먹을 수가 있었소이다. 내가 먹어본 어떤 프랑스 요리나 이탈리아 요리보다도 된장국으로 먹은 그날 저녁의 이 밥식사는 인상적이어서 그 쌀이 어디서 나는 쌀인가고 물어봤더니 황해도 배천 지방의 쌀인데, 옛날 일제강점기의 총독부는 그 쌀을 자기 나라 황실용 진상미로 사용했다는 것이었소이다. 그날 밤 자리에 들어 잠을 청하자니 ‘야, 너는 역시 조선 놈이 아닌가’ 하는 야릇한 감동이 가슴을 적시더이다.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은 역사연구원 김 선생이라는 분의 안내로 주로 김 주석의 일대기에 관한 영화(백인춘씨의 시나리오)를 보는 일로 시간을 보냈는데, 첫날이었는지 둘쨋날이었는지 잊혀지지 않는 일화가 발생하였소이다. 그 영화에는 ‘민생단(民生團) 사건’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민생단이라는 것은 식민지시대 조선 사람들의 만주 항일무장투쟁을 교란시키기 위해 일본 경찰이 빨치산 부대 안으로 침투시킨 스파이 조직이었던 것이오이다. 빨치산 내부에서는 겁에 질려 그 스파이 조직의 역량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눈으로 보면서 공연히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잡아다가 치고 때리고 죽이고 하던 사건으로서 일본 경찰로서는 회심의 미소를 지을 만한 것이었소이다. 민생단에 대해서는 특히 화요회 그룹이 열을 올리고 있었으며, 김일성 대장마저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았다는 장면이 영화에는 나오고 있었소이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김 선생이 쓱 웃으면서 한마디 건네더이다. “정 선생께서도 민생단 사건에 말려든 일이 있으셨지요?” 나는 웃었을 뿐, 내가 한민통에서 받았던 인민재판을 평양에서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별반 놀라지는 않았소이다. 여기서 미리 해두어야 할 얘기가 하나 있는데 어느날 강주일 동지가 내게 이르더이다. “만일 정 선생께서 원하신다면 주석께서 만나주실 텐데, 뭐라고 말씀을 올릴까요?” 처음에는 ‘언감청(焉敢請)일지언정 고소원(固所願)이로소이다’쯤의 느낌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강 동지에게는 사양하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소이다. 김 주석을 만날 때 나나 문 목사나 둘이 다 초대면으로 만나야지, 내가 먼저 김 주석을 만나고 다음에 어쭙잖게 내가 소개하는 형식으로 문 목사를 김 주석과 만나게 한다면 도리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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