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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평양 떠나던날 들려온 ‘눈물의 플루트 가락’ / 정경모

등록 2009-09-21 18:45수정 2009-09-21 21:21

필자가 첫 평양 방문 때 감명 깊게 들은 노래 ‘눈이 내린다’의 악보.(아래) 이 노래는 북한의 ‘4대 혁명무용’의 하나로 꼽히는 <눈이 내린다>(위)의 주제곡으로 항일투쟁과 천리마운동을 연관시킨 작품이다. 30여명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필자가 첫 평양 방문 때 감명 깊게 들은 노래 ‘눈이 내린다’의 악보.(아래) 이 노래는 북한의 ‘4대 혁명무용’의 하나로 꼽히는 <눈이 내린다>(위)의 주제곡으로 항일투쟁과 천리마운동을 연관시킨 작품이다. 30여명의 무용수가 등장한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01





필자가 첫 평양 방문 때 감명 깊게 들은 노래 ‘눈이 내린다’의 악보.
필자가 첫 평양 방문 때 감명 깊게 들은 노래 ‘눈이 내린다’의 악보.
1988년 12월, 그때 내가 먼저 혼자서 평양을 방문한 목적은 만일 문익환 목사가 평양까지 온다면 틀림없이 김일성 주석을 만날 수 있겠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소이다. 그러나 평양 쪽이 쌍수를 들어 문 목사를 환영하겠다는 것은 이미 내가 도쿄에 있을 때 확인해 둔 바이며, 문 목사가 염려하듯 옥류관 냉면이나 한 그릇 얻어먹고 헛탕으로 돌아갈 리는 만무하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갔다 오라고 하니 유람을 겸해서 평양 방문 길에 나선 거나 마찬가지였소이다. 새삼스럽게 만날 수 있느냐의 여부에 관해서 내가 물어본 일도 없었거니와 그쪽에서도 문젯거리로 삼은 일이 없었소이다. 두 분이 만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으니 말이외다.

다만 두 분의 만남이 만일 일종의 ‘외교적’ 정상회담이라고 한다면, 회담 내용이나 회담이 끝난 다음의 성명문이나 미리 마련해두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나 두 분의 만남이 무슨 외교적인 절차나 항례에 따라야 한다는 성격의 회담이 아니니만치, 모든 것을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는 것이 가장 옳은 길이라고 나는 믿었기 때문에, 만남에 관한 형식이나 절차에 대해서는 일절 미리 정해둔 바가 없었으며, 나는 그저 마음 턱 놓고 한 열흘 동안 냉면도 먹고, 영화도 보고, 박물관 구경도 하면서 마음껏 유람여행을 즐겼소이다.

내가 묵고 있던 초대소는 침실 옆에 집무실과 손님을 맞이하는 객실이 붙어 있고, 건너편에 식당이 달려 있어 호텔로 치면 스위트룸 격이어서 평양 쪽이 나를 최대한의 환대로 맞아주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소이다.

또 저녁식사 때는 내가 혼자서 저녁을 먹지 않도록 누군가 한두 사람씩 말동무가 되어주게 하는 세심한 배려를 해주는 것이 고마웠는데, 더구나 아직 갓 스물도 채 안 돼 보이는 앳된 처녀아이(여성동무)가 둘 파견돼서 밥 시중과 빨래 시중을 들어주더이다. 별로 화장기도 없으면서도 뛰어난 미모였으며, 수줍어하는 모양이랑 참으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처녀들이었소이다. 고은 선생의 시에 “부산 머슴아가 신의주 가시나에게 장가들고, 평양 머슴아에게 서울 아가씨가 시집간다”는 것이 있지 않소이까. 내게 만일 아직 장가 안 든 아들이 하나 있다면 두 처녀 중의 하나를 며느리로 삼고 싶은 욕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평양 유람을 다 마치고 내일 아침에는 떠나야 될 전날 저녁에는 고려호텔에 가서 위스키도 몇 병 사다 놓고, 그동안 신세 진 몇몇 동지를 초대소로 불러 송별연을 열지 않았겠소이까. 모두들 거나하게 취해 함께 평양 노래의 하나인 <눈이 내린다>를 불렀소이다. 평양 사람들이 부르는 저쪽 노래는, 그게 혹시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시절의 영향일는지는 모르겠으나, 멜로디가 청아하며 어딘가 찬송가를 연상케 하는 정서가 풍기는 것이 대부분이오이다.

내가 거기 머물러 있는 동안 익혀둔 평양 노래 몇 곡 중에 <눈이 내린다>가 특히 마음에 들어 다들 같이 그걸 부른 다음에 곁에서 시중들면서 듣고 있던 두 처자에게 내가 청했소이다. “아가들은 둘 다 플루트를 분다고 들었는데, 둘이서 <눈이 내린다>를 연주해 줄 수는 없을까?”

평양 어린이들은 초등학교 수업이 끝나면 소년궁에 가서 악기 같은 것을 배우기 마련이고, 그때 그 아가들도 플루트를 배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들려달라고 청을 한 것이었는데, 몸을 비꼬고 수줍어하면서 절대로 안 된다고 거절을 하지 않소이까. 손님들 앞에서 불 수 있을 만한 기량이 아니어서 못 불겠다는 것이지요. 억지로 불게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날은 손님들과도 헤어지고, 다음날 아침 식사를 끝내고서 짐을 싸기 시작했소이다. 바로 그때 멀리서 플루트의 듀엣(이중주)이 들려오지 않겠소이까. 밖에서 차는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눈이 내린다/ 흰눈이 내린다/ 빨치산 이야기로/ 이 밤도 깊어가는데/ 불 밝은 창문가에/ 흰 눈이 내린다’


짐을 싸다 말고 멍하니 서서 모습도 보이지 않는 그 두 처자의 플루트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왜 그런지 두 눈에서 펑펑 눈물이 쏟아지더이다.

그로부터 어언 20년의 세월이 흘러갔는데, 그때의 량(梁)아무개, 장(張)아무개 두 처자는 지금 중년 아줌마가 되어 있겠으나, 만일 가능하다면 선물을 한 보따리 싸가지고 다시 한번 평양을 찾아가 그 두 아가들을 만난다면 얼마나, 얼마나 반갑고 감격스럽겠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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