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 3대 거장으로 꼽히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바티칸 시스티나예배당의 천장화 <천지창조> 가운데 ‘아담의 창조’ 부분도. 1989년 3월 20일 삼십여년 만에 도쿄에서 만난 필자와 문익환 목사는 방북 계획이 아니라 ‘신학 토론’으로 회포를 풀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03
문익환 목사를 태운 비행기가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것은 1989년 3월 20일 오후 5시 무렵이었소이다. 무사히 김포공항을 ‘탈출’하여 나리타까지 올 수가 있겠는지, 걱정스러워 뒤에 처져 있던 유원호씨가 김포에서 비행기의 출발을 확인하고 즉시 요코하마 집으로 전화연락을 취하고, 그 시각에 우에노까지 나와 있던 나는 집으로 연락을 해서 오후 2시 반 비행기에 문 목사가 탑승했다는 것을 확인하고서 나리타로 향한 것이었소이다. 같이 평양으로 떠날 예정인 유원호씨는 그 확인작업 때문에 하루 늦은 21일 일본에 도착하게 된 것이었지요. 문 목사와는 삼십여년 만에 공항에서 만나게 된 것인데, 하도 해야 될 얘기가 많아서였던지 호텔(시부야 도부 호텔)까지 오는 동안 오히려 둘 다 잠잠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소이다. 말문이 터져서 많은 말을 나누게 된 것은 저녁 먹는 식탁에서 맥주도 한잔 걸치고 긴장이 풀린 다음부터였는데, 같이 평양으로 떠날 사람들이면서도 화제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르네상스(문예부흥)가 어떻고, 휴머니즘(인본주의)이 어떻고 하는 얘기였소이다. “형님은 인격신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문 목사는 밑도 끝도 없이 묻는 내 질문에 약간 당황했던지 “인격신? 글쎄,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사람들은 역시 자기들 모양으로 팔도 둘 다리도 둘인 형상의 존재라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면서 씩 웃습디다. 그 웃는 모습으로 보아 문 목사는 내 질문의 뜻을 곧 알아차렸다고 느꼈소이다. “설마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그런 존재가 실상 계시다고 하면 말이지만, 그래 팔이나 다리나 얼굴 모습이 우리들 호모사피엔스와 같은 형상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거기서부터 얘기의 실마리가 풀려, 르네상스시대의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의 그림, 비스듬히 누워 있는 아담에게 조물주가 손을 내밀고 있는 그 그림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까, 거의 혐오에 가까운 거부감에 대해 늘 마음에 걸려 있던 것을 문 목사에게 털어놓았소이다. 르네상스를 낳은 휴머니즘 운동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근대문명의 출발점이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으나,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오만(hubris)과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를 낳았으며, 인간과 조물주를 동격으로 묘사한 라파엘로의 ‘천지창조’는 비록 르네상스 미술의 극치일는지는 모르겠으되, 신을 왜소화하고 모독하는 독신(瀆神)이 아닌가. 그런 뜻에서 나는 인격신이라는 것을 수긍할 수가 없는데, 형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따지듯이 물어보았소이다.
그때의 신학 논의를 이 짧은 글에서 다 말할 수는 없으나, 문 목사가 내게 일러준 말은 신이라는 것은 ‘커다란 마음’이라는 것이었소이다. 그때 얘기는 범신론(汎神論)에까지 이르렀는데, 문 목사는 역시 문 목사다운 분이었소이다. “범신론? 범신론이 왜 나빠. 보통 기독교인들은 범신론을 야만이라고 하고 우상숭배로 깔보지만, 풀잎에 맺힌 한 방울 이슬에도 그 커다란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 아냐? 거기에도 신이 계신 거지.” 며칠 뒤에는 평양에 가서 김일석 주석을 만나 민족의 갈 길에 관해 중대한 회의를 준비해야 될 처지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정치적인 얘기가 아니라 인본주의부터 근대 서구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 이르기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담화의 꽃을 피웠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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