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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평양 도착 성명문 ‘모든 통일은 선이다’ / 정경모

등록 2009-09-24 18:37

1989년 3월 25일 베이징공항에서 북쪽에서 보내온 특별기에 오른 필자(왼쪽)와 문익환(오른쪽) 목사가 나란히 앉아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두 사람은 당시 순안비행장에서 내외기자단에게 발표할 도착성명을 다급히 작성해야 했다.
1989년 3월 25일 베이징공항에서 북쪽에서 보내온 특별기에 오른 필자(왼쪽)와 문익환(오른쪽) 목사가 나란히 앉아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두 사람은 당시 순안비행장에서 내외기자단에게 발표할 도착성명을 다급히 작성해야 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04




문익환 목사와 나, 그리고 수행원으로 같이 따라간 유원호 세 사람이 경유지인 베이징을 향해 나리타를 출발한 것이 1989년 3월 24일 오후였소이다. 그러니까 문 목사는 나흘 밤을 도쿄에서 묵은 것인데, 그동안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 관해 나와 둘이서 무슨 의논 같은 것이 있었는가 하면, 전혀 있었다는 기억이 없소이다. 김 주석과의 회담은 마음과 마음의 흐름을 위한 것이니만치 무슨 외교교섭 모양으로 미리 설정된 ‘어젠다’ 같은 것의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마 문 목사와 나 사이의 암묵적인 상호인식이 아니었을까, 지금 그때를 회상하면서 느끼는 감회이외다.

당연히 화젯거리가 될 연방제 문제에 대해서도 나는 나대로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오이다. 이북 쪽이 ‘고려연방제’를 제창한 것은 7·4 공동성명이 있은 다음해인 73년이었으나, 그 이전에 이미 천관우(<동아일보> 주필)씨는 ‘복합국가론’을 발표하였으며(1972년 9월), 거의 같은 때 장준하씨도 <씨알의 소리>(1972년 9월)를 통하여 ‘연방제’에 관한 적극적인 검토를 제안한 일이 있었소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너무나도 민감한 사안이고, 누군가가 연방제를 운운한다면 단박에 빨갱이로 몰리는 판국이었으니 내가 문 목사에게 견해를 말씀드리는 것은 스스로 삼가고 있었던 셈이외다. 문 목사도 거기에 대해 내게 의견을 물은 적도 없었구 말이외다.

그날 중으로 베이징에 도착한 일행은 이튿날인 25일 오후, 주중 조선대사 주창준씨의 안내로 문 목사 일행을 위해 평양에서 보내온 특별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비행기가 뜬 뒤에야 승무원이 다가오더니 지금 순안비행장에는 내외기자단이 대기하고 있으니 도착성명을 준비해 달라는 평양으로부터의 요청을 전하지 않겠소이까. 평양에서는 앞서 다녀간 많은 남쪽 인사들처럼 문 목사 일행도 몰래 왔다가 몰래 돌아가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고 급거 기자단을 소집한 모양이었소이다.

순안공항까지의 비행시간은 한 시간 반도 안 되는데, 나는 그동안에 서둘러 성명문을 작성하지 않으면 아니될 처지에 놓이게 됐소이다. 붓을 들고 글을 쓰고자 하니 문 목사가 지금 평양을 향하여 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물음은 6·29가 왜 ‘속이구’였나와 직결되는 물음이 아니오이까. 대한항공기(KAL) 폭파사건도 그렇고, 88서울올림픽의 소동도 그렇고, 6월 민중항쟁의 그 뜨거웠던 열기를 운산무소시킨 국제적인 거대한 힘의 작용이 머리에 떠오르더이다. 그래서 그때의 감회를 다음 두 가지 점으로 요약하여 도착성명을 작성하였소이다.

① 주변 대국이 어떠한 막강한 군사력과 어떠한 거대한 경제력을 동원하여 우리 민족이 가야 될 길을 막으려 한다 해도 통일에 대한 우리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 ② 아무리 찬란한 경제발전이라고 하나, 또 아무리 우리가 소중하다고 믿는 개인의 자유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통일이라는 민족의 지상과제가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뜻을 지닐 수 있는 가치일 뿐 오히려 통일을 저지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제발전이나, 통일을 거부하는 이념으로 주장되는 개인의 자유라면 우리는 거기에 아무런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통일은 선이라는 것.

문 목사는 내가 쓴 성명문의 문장을 꼼꼼히 검토하거나 자신이 첨삭을 가할 만한 시간이 없는 와중에 그 성명문을 그대로 순안비행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외기자단 앞에서 읽었소이다.

여기 ①과 ②, 특히 ②에 요약된 성명문의 내용은 장준하 선생의 사상을 거의 그대로 담은 것이고, 문 목사가 장준하의 사상을 이어받은 인물인 이상, 이 성명문이 문익환 자신의 사상을 말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나는 믿고 있소이다. 문 목사는 퇴고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넘긴 원고를 고대로 읽으신 것이 아니라, 그 문장 안에 자기의 사고와 상치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나는 믿고 있소이다. 맨 마지막의 ‘따라서 모든 통일은 선’이라는 부분도 장준하의 발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고 문 목사 자신의 사고이기도 하였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그런데 후일 문 목사가 쇠고랑을 차고 법정에 섰을 때, 법정이 가장 문제로 삼고 문 목사를 윽박질렀던 부분이 그 마지막 구절이었소이다.

“그렇다면 적색통일도 선인가?”

문 목사를 다룬 권력은 장준하를 모살한 권력과 같은 권력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으나, 재판정에서 그들이 보인 문 목사에 대한 적개심은 치열한 것이었소이다. 아마 죽이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설마 김 주석을 만나고 온 문 목사를 교수대에다 달 수는 없었겠지요. 있었겠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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