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방문 이튿날인 1989년 3월 26일 평양 봉수교회에서 문익환(앞 오른쪽) 목사와 필자(뒤 왼쪽), 유원호(뒤 오른쪽)씨가 예배를 올리고 있다. 때마침 부활주일을 맞아 문 목사는 ‘민주와 통일은 하나’라는 역사적인 설교를 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05
우리가 평양에 도착한 날이 1989년 3월 25일 토요일이었으며, 공교롭게도 다음날인 26일의 일요일이 부활주일이었는데, 그날 평양 봉수교회에서 한 문 목사의 기념설교는 우연하게도 역사에 남을 만한 명설교가 되었소이다. 그날 봉수교회에는 미국에서 온 리승만 목사와 그와 함께 온 방북단이 자리를 잡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안 사실이나, 보통 때 예배당 같은 곳에 얼굴을 보이는 일이 없는 노동당 간부들도 많이 참석하고 있었던 관계로,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꽉 찬 상태였소이다. 강단에 오른 문 목사가 목메어 우는 목소리로 부르짖은 설교 중의 한마디가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다”라고 하는 역사적인 발언이었소이다. 강단에 오른 문 목사의 뇌리에는 전태일, 김상진, 박종철, 이한열 등등 수도 없이 죽어간 젊은이들의 모습이 스쳐갔겠지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는 민주의 꽃이 피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활짝 핀 민주의 꽃과 더불어 죽어간 젊은 넋들은 부활하게 되는 것이지요. 또 해방되었다고 남이나 북이나 좋아서 날뛰던 날이 바로 어제 같은데, 남의 나라가 와서 멋대로 그어 놓은 38선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치고 죽이고 하는 비극은 언제 끝이 날 것인가. 38선이 걷히고 통일이 이룩되어 이 땅에서 미움과 살육이 자취를 감출 때, 그동안 무더기로 죽어간 셀 수도 없는 많은 넋들이 부활하게 되는 것이 아니오이까. 문 목사는 ‘부활’이라는 한마디의 키워드로써 민주와 통일을 따로따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개념으로 융합시킨 것이었소이다. 그동안 남쪽 민주화 진영에서는 ‘선민주 후통일’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민주와 통일을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있었고, 내가 아는 한 문 목사 역시 ‘선민주 후통일’을 주장하는 쪽이었소이다. 그런데 봉수교회 강단에 선 순간, 민주와 통일은 일체라는 일종의 사상적인 변혁을 순간적으로 체험한 것이 아닐까 해요. 문 목사의 시인다운 표현을 떠나 약간 딱딱한 논리적 표현을 빌린다면, 민주화는 반독재인데 그 투쟁의 대상인 독재가 외세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것이라면 반독재는 반외세라는 말이고, 따라서 반외세는 즉 통일에 대한 주장이 아니오이까. 민주가 즉 통일이고 통일이 즉 민주이며, 둘은 따로따로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것인데, 문 목사는 그러한 논리적인 분석을 뛰어넘어, 직감적으로 부활이라는 개념 속에 민주와 통일을 일체화시킨 것이외다. 문 목사는 또 평양에 머물러 있는 동안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은 더 커지는 것”이라는 금언도 남겼소이다. 다이아몬드의 원래 무게가 만일 한 캐럿이었다면 그걸 그대로 유지해야지 둘로 쪼갠다면 그 값어치가 어떻게 되겠소이까. 문 목사의 사고방식이 허공을 뛰어넘는 시적인 것이라면 나 자신의 사고방식은 땅 위를 기어가는 산문적인 것임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그날 미국에서 온 리승만 목사가 자리를 같이해준 것은 내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소이다. 리 목사는 원래가 평양 태생이지만, 해방 후 이북에서 토지혁명 때문에 기독교와 사회주의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벌어졌을 때 역시 목사님이던 선친께서 목숨을 잃으신 까닭에, 어려서 미국으로 건너간 분이오이다. 그는 미국에서 민주화운동을 지도하면서도 큰 틀 안에서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선친께서 목숨을 잃었다는 비극도 극복하고 이북 체제와 완전한 화해를 이룬 다음 무척 자주 평양을 방문하고, 봉수교회를 물질적으로도 돕고 있었으며, 그날 부활절 때에도 오디오 장치를 기증하기 위해 거기에 와 있는 듯하였소이다. 사면과 화해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이북 당국에서도 그 분란 통에 난동을 부린, 주로 기독교인들에게도 죄를 묻지 않는 정책을 쓴 것으로 나는 알고 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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