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3월 27일 평양 주석궁에서 열린 환영 만찬에서 필자(왼쪽)와 김일성(가운데) 주석이 북한 특산품인 백두산 들쭉술로 건배를 하고 있다. 이 자리에는 문익환(오른쪽) 목사와 며칠 먼저 도착해 있던 작가 황석영씨도 함께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08
김일성 주석과 문익환 목사의 회담 내용이나 평양에서 있었던 여러 행사에 관해서는 문 목사 자신이 남기신 글을 통해 이미 많은 것이 알려져 있고 해서, 나는 이 기회에 회식하는 자리에서 김 주석으로부터 들은 인상 깊은 일화를 하나 소개해 두고자 하는 바이외다.
김 주석의 부친인 김형직 선생이 기독교 장로로 시무했다는 것은 앞서 글 어디에선가 말한 바가 있었소이다만(24회), 어머니 강반석 부인도 교회를 다니시면서 ‘전도 부인’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어 김 주석에게 물어보았소이다.
“자당께서 전도부인이셨다고 들었는데 틀림없는 사실이겠지요.”
주석은 껄껄껄 웃으면서 “아냐, 전도부인이라는 말은 와전이겠지만, 예배당에는 열심히 다니셨지” 하며 옛날 어릴 적 일을 얘기하더군요. 삼일예배날(수요일) 저녁종이 땡땡 울리면 “엄마 엄마, 예배당 갈 시간이야” 하면서 어머니를 재촉해 같이 예배당엘 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하시기만 하면 어머니는 쿨쿨 코를 골면서 잠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3장 찬송이 시작될 때쯤 “엄마, 예배 다 끝났어” 하고 어머니를 흔들면 깜짝 놀라서 눈을 뜨시더라고, 나나 문 목사가 허리를 잡고 웃을 지경으로 유머러스하게 얘기를 해요.
아무튼 ‘삼일예배날’이랑, 예배가 끝날 때면 다 같이 부르는 ‘이 천지간 만물들아 복 주시는 주 여호와…’ 하는 3장 찬송이랑, 기독교 집안의 풍습을 훤히 알고 있더군요.
그때 김 주석의 어릴 때 얘기를 들으면서 문 목사나 나나, 또 김 주석이나 모두가 그 시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는 ‘기독교적 민족주의’를 다 같이 공유하고 있음을 무언중에 감지할 수가 있었는데 얘기 끝에 주석은 한마디 덧붙여 건네주더군요.
“정 선생, 나는 물론 공산주의자지만, 실상은 민족주의를 하기 위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 아닙니까.”
주석이 한 그 말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함축 있는 발언이었는데, 공산주의자가 아닌 문 목사나 나에게 그냥 ‘립서비스’로 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은 아무 설명 없이도 바로 이해할 수가 있었소이다.
원래 마르크스가 제창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밑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유럽 노동계급의 해방을 주장하는 사상이었지, 제국주의의 억압 아래서 신음하는 식민지 백성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사상은 아니었소이다. 마르크스가 발표한 ‘공산당선언’(1848년)만 해도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였지, “만국의 식민지 백성이여 단결하라”고는 하지 않았소이다. 너무 초보적인 해설을 늘어놓는 것 같아 약간 주저스러우나,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계급주의 일변도를 벗어나 굴욕과 빈곤에 허덕이는 식민지 백성의 해방에 눈길을 돌리게 되는 것은 제2회 코민테른(1920년)에 참가한 인도 대표 로이가 ‘선진 자본주의 경제가 따지고 보면 식민지에 대한 수탈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영국이나 프랑스의 노동계급이라 할지라도 그 수탈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한 때부터였소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김일성 소년이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1925년),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타도제국주의’ 운동에 투신하였을 때, 자기 몸에 베어 있는 기독교적 민족주의와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주장하는 공산주의 사이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고, 오히려 체내의 기독교적 민족주의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 데 촉매 구실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바이외다. 해방 뒤 김성수나 송진우 등을 원류로 하는 남쪽의 보수주의자들이 자기들은 ‘민족진영’이라 부르면서 민족주의가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 듯 주장해 온 것이 역사의 흐름이 아니었소이까. 그런데 예를 들어 광주 시민들이 황석영씨를 통해 내게 보내온 <백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소이까.
“해방 때부터 역대 독재정권의 출발점은 일제의 잔재세력이었으며, 이 세력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공범은 미국이다.”(1986년)
조지 오웰이 쓴 소설에 <1984년>이라는 것이 있지요. 여기에 나오는 오세아니아라는 국가에서는 ‘뉴 스피크’(New Speak)라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언어에서는 ‘평화’는 ‘전쟁’을 뜻하며, ‘자유’는 ‘노예’를, ‘힘’이라는 말은 ‘무지’를 뜻한다고 하더군요.
한국은 설마 오세아니아는 아닐 터인데, ‘민족진영’이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말이오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원래 마르크스가 제창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밑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유럽 노동계급의 해방을 주장하는 사상이었지, 제국주의의 억압 아래서 신음하는 식민지 백성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사상은 아니었소이다. 마르크스가 발표한 ‘공산당선언’(1848년)만 해도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였지, “만국의 식민지 백성이여 단결하라”고는 하지 않았소이다. 너무 초보적인 해설을 늘어놓는 것 같아 약간 주저스러우나,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계급주의 일변도를 벗어나 굴욕과 빈곤에 허덕이는 식민지 백성의 해방에 눈길을 돌리게 되는 것은 제2회 코민테른(1920년)에 참가한 인도 대표 로이가 ‘선진 자본주의 경제가 따지고 보면 식민지에 대한 수탈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영국이나 프랑스의 노동계급이라 할지라도 그 수탈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한 때부터였소이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김일성 소년이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만주로 건너가(1925년),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타도제국주의’ 운동에 투신하였을 때, 자기 몸에 베어 있는 기독교적 민족주의와 식민지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주장하는 공산주의 사이에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고, 오히려 체내의 기독교적 민족주의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 데 촉매 구실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바이외다. 해방 뒤 김성수나 송진우 등을 원류로 하는 남쪽의 보수주의자들이 자기들은 ‘민족진영’이라 부르면서 민족주의가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 듯 주장해 온 것이 역사의 흐름이 아니었소이까. 그런데 예를 들어 광주 시민들이 황석영씨를 통해 내게 보내온 <백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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