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판결로 민사소송 진행 수십건 ‘된서리’
주민들 처음부터 다시 재판땐 대혼란 예고
주민들 처음부터 다시 재판땐 대혼란 예고
“정말 답답해요. 재개발 실정을 너무 모르고 내린 판결이니까요.”
박양원 ‘서울 성동구 옥수 13구역 재개발 비상대책회’(비대위) 위원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는 1년 넘게 재개발조합을 상대로 ‘조합설립 무효확인 소송’을 진행중이다.
박 위원장을 비롯해 옥수동 주민들은 16일로 예정된 1심 판결만 기다려왔는데, 최근 대법원 판결에 ‘뒷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다. 대법원 1부(주심 김영란)가 지난달 24일 서울 노원구 월계동 주민들이 낸 조합설립 무효확인 소송에서 “재건축·재개발 소송은 민사법원이 아닌 행정법원에서 진행해야 한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이는 “재건축·재개발 조합도 행정 주체의 지위를 갖는다”는 뜻으로, 조합의 공공성과 책임성을 강조한 판결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당장 민사법원에서 진행중인 수십 건의 재건축·재개발 관련 소송이 ‘관할 위반’으로 된서리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07년 ‘서울 옥수 13구역 재개발 추진위원회’는 성동구 매봉 자락에 깃든 산동네 주민들에게 ‘조합설립 동의서’를 받으며 건축비를 2870억원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1년 만인 지난해 10월 건축비가 5421억원으로 88%나 폭증한 사실을 알게됐다. 분노한 주민들은 비대위를 꾸려 지난 1월 서울동부지법에 “주민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동의서는 무효”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 동부지법 민사21부(재판장 권택수)는 주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넉달 만에 “조합의 설립 동의서는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며 본안소송의 판결이 날 때까지 조합 활동을 정지시켰다.
그동안 조심스레 승소를 점쳐왔던 비대위 소속 주민들은 이번 대법원 판결로 재판부가 어쩔 수 없이 소송을 각하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럴 경우, 조합은 주민들이 행정법원에서 똑같은 판결을 얻을 때까지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 기간에 ‘건물 철거’ 등 마을에 변화가 진행되고 주민들은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김경택 ‘전국 뉴타운·재개발 비상대책위원회연합’ 법무국장은 “이번 대법원 판결로 현재 소송이 진행중인 수십개의 재개발·재건축 구역에 큰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지난 7일 집계한 ‘서울 주요 재개발 지역 20곳의 조합설립 무효소송 진행 현황’ 자료를 보면, 동대문구 ‘전농 10구역’ 한 곳을 뺀 19곳에서 행정법원이 아닌 민사법원에서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그 가운데는 ‘금호 15구역’과 같이, 행정법원에서 “민사소송으로 무효확인을 구해야 한다”고 패소 판결을 받은 뒤, 민사법원으로 가서 1심에서 이기고 2심이 진행중인 곳도 있다. 재개발 사업은 △조합 설립 △시공사 선정 등을 둘러싼 각종 비리와 탈법 의혹이 많아, 10개 이상의 소송이 얽혀 있는 구역도 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