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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붉은 악마에 철추’ 김기춘 검찰총장 담화문 / 정경모

등록 2009-11-08 23:07

1989년 4월 5일 문익환 목사와 필자가 평양에서 도쿄에 도착했을 때 숙소에 와 있던 배동호씨의 한민통 대중집회 초청 편지(왼쪽). 그해 4월 9일치 <한겨레신문> 1면 ‘한겨레논단’에 실린 리영희 선생의 칼럼.
1989년 4월 5일 문익환 목사와 필자가 평양에서 도쿄에 도착했을 때 숙소에 와 있던 배동호씨의 한민통 대중집회 초청 편지(왼쪽). 그해 4월 9일치 <한겨레신문> 1면 ‘한겨레논단’에 실린 리영희 선생의 칼럼.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10
1989년 4·2 공동성명이 발표된 그날로 문익환 목사 일행은 평양을 출발해, 3일과 4일의 이틀을 베이징에서 머문 뒤, 5일 나리타로 향하는 중국항공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나리타에 도착하고 보니 한민통 사람들이 동원돼 문 목사 일행을 환영한다는 깃발을 흔들고 있었으며, 밖으로 나오는 통로에서 내게까지 덥석 꽃다발을 안겨주는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소이다.

공항까지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주신 분은 교회협의회(NCC)의 나카지마(中嶋), 마에지마(前島) 목사님이셨고, 그 두 분의 안내로 한민통 사람들의 북새통을 빠져나와 미리 예약해 두었던 긴자도부호텔에 무사히 도착한 것은 저녁때가 가까운 시간이었소이다.

호텔에 도착하고 보니 ‘문익환 목사의 방북 성과를 옹호지원하며, 탄압음모를 규탄하는 긴급집회’라는 긴 이름의 대중집회를 열겠으니 참석해 달라는 배동호씨의 전갈이 기다리고 있더군요.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김대중씨 이름을 팔아먹더니, 이번에는 같은 수단으로 문 목사를 이용하려 드니, 그 심보가 얄밉고 천박하지 않소이까.

그래서 배씨더러 호텔로 좀 오라고 전화를 했고, 방으로 들어온 그를 앞에다 앉혀 놓고 호통을 쳤소이다. “여보쇼, 당신들이 반 조각이나마 인간다운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오?” 해놓고서, 약간 넘겨짚는 말을 섞어 닦아세웠소이다. “당신들이 나를 펜타곤(미국) 스파이로 몰아 인민재판에 건 사실을 평양에서도 다 알고 있습디다. 옛날 나하고 같이 맥아더사령부(GHQ)에 있으면서 펜타곤 스파이 노릇을 한 문익환 목사가 여기 계신데, 뭐, 그를 위해 환영회를 열겠다고요? 그건 문 목사를 위한 것입니까, 당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한 것입니까?”

배씨는 머쓱한 얼굴로 문 목사에게는 간다는 인사도 못하고 문밖으로 사라지더군요. 그 다음날이었을까, 이우정 선생이 서울의 형편을 알리고 김포공항까지 동행해 주기 위해 도쿄까지 마중을 나와주었소이다. 공안당국이 문 목사를 비난하면서 돌아오는 길로 바로 문 목사를 교수대에라도 걸듯이 길길이 뛰고 있다는 사정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얘기해주더군요. 이 선생을 통해 문 목사를 기다리고 있는 공안당국의 분위기는 대강 짐작할 수가 있었는데 우연히 호텔 로비에 비치되어 있는 영문주간지 <뉴스위크>를 훑어보니, 당시의 검찰총장 김기춘이 문 목사의 평양 방문을 혹독하게 힐난하는 담화문이 눈에 띄더이다. 그 담화문에 문이나 정이나 이름은 거명되어 있지 않았으나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소이다.

‘지금 한국에는 국금을 범하고 제멋대로 평양을 드나들고 있는 붉은 악마들이 횡행하고 있어 걱정스러운데, 이따위 악마들에게는 가차 없이 철추를 내려야 할 것이다.’

‘붉은 악마’ 문익환에게 철추를 내리겠다는 검찰총장 김기춘은 어떠한 인물인가. 1992년말 김영삼-김대중 두 진영의 대통령 선거전이 치열해지고 있을 무렵, 김영삼 후보의 당선을 위해 전·현직 기관장들이 빈번히 모여 전략회를 열고 있다는 이른바 ‘초원복국집’ 사건이 커다랗게 보도된 일이 있었소이다. 기관장들이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비밀 구수회의를 열었다면 이건 탄핵받아야 옳을 범법행위인데 그 개최자가 다름 아닌 법무장관을 거쳐 국회의원이 된 김기춘이었소이다. 그것보다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사태로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앞장서서 깃발을 흔든 자가 한나라당 법제사법위 위원장 김기춘이었다고 하면, 아, 그런가 하고 그 이름을 상기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하오이다.

사람은 어떠한 인물로부터 미움을 받았나에 따라 더욱 선명하게 그 인품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만일 문 목사가 김기춘과 같은 자로부터 미움을 샀다면 그건 자랑스러운 명예가 아니겠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4월 13일, 문 목사가 귀국길에 올라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비행기 안에서부터 받은 모욕과 폭행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고 내가 새삼 이 글에서 언급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 폭풍우와 같은 비난 속에서 의연히 일어나 문 목사의 장거를 극구 칭송해주신 분이 계셨소이다. 바로 리영희 선생이셨지요.

“문익환 목사님, 당신은 정말로 큰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한 마디 한 동작은 모두의 가슴에 겨레사랑의 뜨거운 불을 댕겨주었습니다. 당신이 홀로 세운 큰 탑은 먼 훗날 분단사와 통일사를 가르는 역사적인 분기점으로 우뚝 서서 길이 후세에 빛날 것입니다. 그처럼 엄청난 일은 티끌만한 사심도 없는 당신이기에, 오로지 당신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한겨레> 1989년 4월 9일치)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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