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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정경모 만나면 쇠고랑’…그냥 가버린 성 교수 / 정경모

등록 2009-11-10 19:06수정 2009-11-11 03:20

한평생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다 해직과 투옥의 고초를 겪었던 민중교육학자 성내운 교수가 작고 1년 전인 1988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한평생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다 해직과 투옥의 고초를 겪었던 민중교육학자 성내운 교수가 작고 1년 전인 1988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12

문익환 목사가 쓰신 유명한 시 중에 ‘꿈을 비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지 않소이까.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남도 몰래 저도 몰래 자라나는 진주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그러니 벗들이여!’

상당히 긴 이 시를 암송으로 줄줄 학생들 앞에서 읊으시면 그야말로 ‘개똥같지 않은 내일’을 꿈꾸는 젊은 학생들이 눈물을 흘린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서 나 역시 퍽 감동을 느끼고 있던 분이 계셨소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기억에 떠올리는 독자들도 있을 듯한데 그분은 연세대 성내운 교수였소이다.

그게 아마 광주 5·18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던 1982년 정월이었던 것 같은데 미국에 있는 친구 이행우씨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성내운 교수가 지금 여기 와 계신데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도쿄에 들러 당신을 꼭 만나보고 싶다니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는가고요. 성 선생이야 내가 만나 뵌 일은 없지만 소문으로 듣고서 존경하고 있던 분이고, 나도 한번 뵙고 싶으니 꼭 들러주시기를 바란다고 했지요. 그때 굉장히 눈이 많이 왔어요. 오신다던 날은 눈 때문에 못 오시고, 다음날에야 도쿄에 도착해 저녁때쯤에 전화를 해왔소이다. 내일 오후 다섯시에 ‘씨알의 힘’ 사무실로 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이외다. 성 선생께서 묵고 계신 숙소에서 ‘씨알의 힘’ 사무소까지의 길은 미리 이행우씨를 통해 알려 드린 터이라, 그리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선생께서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가능하다면 (당시) 망명객으로 도쿄에 와 있는 지명관씨와도 만나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싶으니 연락을 취해 달라’고 하고서, 내가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소이다.

약간 난감해졌소이다. 지명관씨는 독재정권의 박해를 피해서 일본으로 망명해 온 분이라는 것은 풍문으로 듣고는 있었으나, 1970년대 초반부터 10년 가까이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차 한잔 나눈 적이 없었으며 내가 그에게 전화 같은 것을 걸어 본 일도 없었으니 말이외다.

그런데 내가 한민통에서 쫓겨나기 전 일이지만 기관지 <민족시보>를 내는 일로 나를 돕고 있던 사람이 김학현씨라는 분이었는데 그가 지씨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가끔씩 같이 식사도 하고 맥주잔도 걸치고 하는 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내가 부탁한 일이 있었소이다. 지 선생은 망명객으로는 선배인 내게 인사 한마디가 없는데, 선배인 내가 후배인 그를 한번 만나볼 수는 없을까고 말이외다. 그때 김씨의 대답이 인상적이었소이다. “만나면 실망하실 테니까, 안 만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나는 그 이유를 캐묻지도 않고, 다만 지씨가 혼자 살고 있을 집 주소와 전화번호(202-5105)는 물어서 메모를 해두었던 것이오이다.

그래서요, 성 선생이 하시는 말씀이니 안 들을 수도 없고, 별로 내키지 않는 맘으로 그가 사는 주소를 찾아 전화를 걸었소이다. 전화에 나온 지씨의 대답은 내가 반은 얘기했던 대로였소이다. “저는 빠지겠습니다. 두 분만 하시지요.” 그래놓고서도 지금 성 선생이 어디서 묵고 계신가 묻습디다. 나는 고지식하게 숙소를 가르쳐주었소이다. 분쿄구 고이시카와에 있는 도미사카 기독교센터라고 말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다음날 오후 두시쯤이었을까. 성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어요. “지금 지 선생과 같이 나온 부인하고 신주쿠에서 점심을 하고 있는데, 다섯시까지는 약속대로 찾아가겠으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이외다. 다섯시부터 기다렸을 것 아니오이까. 그런데 여섯시가 되어도, 일곱시가 되어도, 여덟시가 가까워졌는데도 성 선생은 나타나지 않고, 전화도 없어요. 아~, 지명관, 이자가 무슨 농간을 부린 것이로구나. 뒤늦게 알아차리고 쓴입을 다시면서 집으로 돌아갔소이다. 성 선생 숙소에도 전화를 걸어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인가고 물을 생각도 없이 말이외다.


며칠 뒤에 미국 이행우씨한테서 전화가 왔소이다. 성 선생은 그날 지씨와 점심을 같이 했는데 그 자리에서 되게 협박을 당한 것이라고요. ‘만일 당신이 여기서 정경모를 만난다면 김포공항에 닿는 길로 쇠고랑을 차고 형무소로 직행하게 될 텐데, 그래도 좋다면 만나라.’

혼쭐이 난 성 교수는 그래서 내게는 전화할 엄두도 못 내고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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