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다 해직과 투옥의 고초를 겪었던 민중교육학자 성내운 교수가 작고 1년 전인 1988년 서울 탑골공원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12
문익환 목사가 쓰신 유명한 시 중에 ‘꿈을 비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지 않소이까.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남도 몰래 저도 몰래 자라나는 진주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그러니 벗들이여!’ 상당히 긴 이 시를 암송으로 줄줄 학생들 앞에서 읊으시면 그야말로 ‘개똥같지 않은 내일’을 꿈꾸는 젊은 학생들이 눈물을 흘린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서 나 역시 퍽 감동을 느끼고 있던 분이 계셨소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기억에 떠올리는 독자들도 있을 듯한데 그분은 연세대 성내운 교수였소이다. 그게 아마 광주 5·18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던 1982년 정월이었던 것 같은데 미국에 있는 친구 이행우씨한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성내운 교수가 지금 여기 와 계신데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도쿄에 들러 당신을 꼭 만나보고 싶다니 시간을 내줄 수 있겠는가고요. 성 선생이야 내가 만나 뵌 일은 없지만 소문으로 듣고서 존경하고 있던 분이고, 나도 한번 뵙고 싶으니 꼭 들러주시기를 바란다고 했지요. 그때 굉장히 눈이 많이 왔어요. 오신다던 날은 눈 때문에 못 오시고, 다음날에야 도쿄에 도착해 저녁때쯤에 전화를 해왔소이다. 내일 오후 다섯시에 ‘씨알의 힘’ 사무실로 갈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이외다. 성 선생께서 묵고 계신 숙소에서 ‘씨알의 힘’ 사무소까지의 길은 미리 이행우씨를 통해 알려 드린 터이라, 그리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선생께서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가능하다면 (당시) 망명객으로 도쿄에 와 있는 지명관씨와도 만나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싶으니 연락을 취해 달라’고 하고서, 내가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소이다. 약간 난감해졌소이다. 지명관씨는 독재정권의 박해를 피해서 일본으로 망명해 온 분이라는 것은 풍문으로 듣고는 있었으나, 1970년대 초반부터 10년 가까이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차 한잔 나눈 적이 없었으며 내가 그에게 전화 같은 것을 걸어 본 일도 없었으니 말이외다. 그런데 내가 한민통에서 쫓겨나기 전 일이지만 기관지 <민족시보>를 내는 일로 나를 돕고 있던 사람이 김학현씨라는 분이었는데 그가 지씨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가끔씩 같이 식사도 하고 맥주잔도 걸치고 하는 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내가 부탁한 일이 있었소이다. 지 선생은 망명객으로는 선배인 내게 인사 한마디가 없는데, 선배인 내가 후배인 그를 한번 만나볼 수는 없을까고 말이외다. 그때 김씨의 대답이 인상적이었소이다. “만나면 실망하실 테니까, 안 만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나는 그 이유를 캐묻지도 않고, 다만 지씨가 혼자 살고 있을 집 주소와 전화번호(202-5105)는 물어서 메모를 해두었던 것이오이다. 그래서요, 성 선생이 하시는 말씀이니 안 들을 수도 없고, 별로 내키지 않는 맘으로 그가 사는 주소를 찾아 전화를 걸었소이다. 전화에 나온 지씨의 대답은 내가 반은 얘기했던 대로였소이다. “저는 빠지겠습니다. 두 분만 하시지요.” 그래놓고서도 지금 성 선생이 어디서 묵고 계신가 묻습디다. 나는 고지식하게 숙소를 가르쳐주었소이다. 분쿄구 고이시카와에 있는 도미사카 기독교센터라고 말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며칠 뒤에 미국 이행우씨한테서 전화가 왔소이다. 성 선생은 그날 지씨와 점심을 같이 했는데 그 자리에서 되게 협박을 당한 것이라고요. ‘만일 당신이 여기서 정경모를 만난다면 김포공항에 닿는 길로 쇠고랑을 차고 형무소로 직행하게 될 텐데, 그래도 좋다면 만나라.’ 혼쭐이 난 성 교수는 그래서 내게는 전화할 엄두도 못 내고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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