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말 국회에서 열린 ‘5공 언론인 해직문제에 관한 청문회’에 출석한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이 땀을 닦고 있다. 그는 <조선일보> 기자와 주일 공사를 거쳐 80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해직 작업을 주도한 책임을 집중 추궁당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13
한민통 곽동의씨로부터는 여전히 ‘정경모는 펜타곤 스파이’라는 중상공격을 받고 있었고, 또 이번에는 지명관씨가 미국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정경모는 평양 공작원’이라는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고 하니 나는 말하자면 이중간첩이 되어 스파이 활동을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소이다.
아마 1985년 여름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어느날 리영희 선생에게서 지금 아내와 도쿄에 있으니 얼른 나와서 점심을 같이하자고 전화가 왔소이다. 리 선생은 친구 분들의 주선으로 도쿄대학 객원교수로 초빙받아 오셨다고 알고 있었으나, 정부 당국이 아마 골탕을 먹이려는 심산이었겠지요. 부인에게는 여권 발부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외다. 그래서 나는 만일 리 선생이 오신다면 십중팔구 혼자서 오실 터이고 부인 동반으로 오시는 ‘호강’은 난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있던 참이었소이다. 그런데 여권 발급이 허용되어 부인께서도 나중에 건너 오실 수가 있게 된 것이외다.
그러니 내가 여쭤봤을 것 아니오이까. 어떻게 여권이 나왔느냐고요. 리 선생이 껄껄 웃으시면서 “이번에 전옥숙 여사 덕을 톡톡히 봤소이다.”
70년대 후반부터 도쿄로 와서 한국 홍보성 잡지 <한국문예>를 발행하고 있던 전옥숙 여사가 자기는 김지하하고는 오누이 같은 사이고 리영희 선생 댁에도 스스럼없이 드나들고 있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소문으로는 듣고 있었으나, 그건 아마 허풍일 거라고 나는 귓전으로 흘리고 있었는데, ‘한국의 마타하리’로 불릴 정도였던 전 여사 덕분에 리 선생 부인께서 여권을 받을 수가 있었다는 얘기가 내게는 퍽 의외스러웠소이다.
그때 허문도씨가 승강기식 출세로 통일원 장관 자리에 있었는데 전 여사가 허 장관과도 통하는 사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외무부에서 연락이 와 여권 발급을 받았다는 것이외다. 물론 허 장관의 주선이었지요.
그때 그 얘기를 들으며 심상치 않은 기억의 한 토막이 홱 내 뇌리를 스쳐 가더이다. 80년 초 허문도씨가 주일대사관 공사직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갈 때, 어느 일본인 신문기자가 전화를 걸어와 “일개 공사를 위한 송별연치고는 걸맞지 않게 요란하더라”고 전하더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지 않소이까(86회). 그런데 그 기자는 그때 송별연 얘기를 전하려던 것이 아니라, 자기도 초청을 받고 한국대사관으로 가 보니까 허씨 옆자리에 ‘망명객’ 지명관씨가 앉아 있었는데 그게 도대체 어떻게 된 셈판인가를 물어온 전화였소이다.
‘망명’이라는 것은 본국 정부의 법적 보호권 밖으로 추방당했다는 뜻인데, ‘망명객’이 본국 정부가 발급하는 여권을 가지고 외국을 여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외다. 여권을 가진 망명객이란 그야말로 ‘비 오는 달밤’ 식의 형용모순인데, 망명객 지씨는 미국까지 드나들고 있었소이다.
허씨는 원래 <조선일보> 기자 신분으로 일본에 유학 왔다가 선우휘씨의 미는 힘으로 대사관으로 들어가 금방 몇 단계 뛰어넘어 공사가 된 사람이니, 두 사람은 특수한 관계가 아니었겠소이까. 지씨는 한민통에서 나와 같이 일하고 있던 김학현씨를 통해 한민통의 내부 정보를 수집해 그것을 허씨에게 흘리고 있었던 것이외다. 김학현씨 자신은 착하고 곧은 사람이어서 설사 한민통 안의 불미스러운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해서 그것을 권력기관에다 ‘고자질’할 사람은 절대로 아니외다. 그러나 그러한 정보가 지씨의 손으로 넘어갔다면 문제는 다르지 않소이까.
김대중 선생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또 그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피비린내 나는 참사를 겪게 된 광주 5·18항쟁이 무슨 이유로 일어났든지 간에 그 하수인은 전두환씨였는데, 지씨가 허씨를 통해 전씨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면 어떻게 되오이까. 같은 굴 안의 너구리 아니리까?
그런 것을 까맣게 모르는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노벨상을 타러 오슬로로 가는 비행기에까지 지씨를 태우고 갔다 하니 참….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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