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한일 역사연구 촉진에 관한 공동위원회’ 한국위원장으로 임명된 지명관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장의 ‘2000년 국제교류기금상’ 수상 소식을 소개한 일본국제교류기금 홈페이지.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19
1997년 7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 직전 두 나라 정부의 합의로 ‘한일 역사연구 촉진에 관한 공동위원회’가 설치됐는데, 이후 역사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김 대통령이 임명한 인물은 지명관 한림대 교수였소이다.
그런데 ‘통석지념’이 무슨 뜻인가고 묻는 <동아일보>의 질문에 대한 지 교수의 답이 ‘사전에도 없는 말이고 일본의 작가 아무개가 만들어낸 조어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니었소이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되 일본 사람들과 맞붙어 논쟁을 해야 될 위치에 있는 지 교수의 해답이라면 이건 문젯거리이기도 하려니와, <동아일보> 자체의 권위를 생각해서라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조심스러운 말로 오류를 지적하고 정정기사를 내도록 투서 형식으로 그 신문에 편지를 냈소이다. 얼마 안 가서 그 기사의 담당인 김아무개 기자로부터 “어떻게 처리할지 사내 결정이 내리는 길로 통지하겠다”는 전화연락이 있었는데, 그 후 1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 ‘사내 결정’에 대해 회답은 없었소이다.
한-일 간에 역사인식을 공통된 것으로 하자는 위원회에서 어떠한 문제가 제기되고 어떠한 토론이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발표된 적이 없었는데,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한다는 문제는 여러 신문에 요란스러운 보도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여기에 발벗고 나서서 활약한 사람이 다름아닌 지 교수였소이다.
우선순위로 보아 역사인식의 공통화가 대중문화의 개방보다는 더 시급한 문제가 아닐까 느끼면서도 이것은 또 이것대로 뜻이 없는 일은 아니라 여기고 그저 먼발치로 넘겨다보고 있던 중, 대중문화를 개방하고 한-일 우호관계 증진에 공헌한 바가 크다는 점을 들어 일본 외무성 외곽단체인 ‘일본재단’(재팬 파운데이션)이 500만엔이 붙은 공로상을 지 교수에게 주었다는 보도가 눈에 띄더이다.
이 수상에 대해 <동아일보>도 무슨 경사라도 났다는 듯이 기사를 실었는데(2000년 10월 6일치), 그게 내 생각에는 마땅치가 않았소이다.
지 교수는 ‘역사연구공동위’ 한국 쪽 위원장이고, 일본 쪽 상대는 주한 일본대사를 지낸 스노베 료조 교수인데, 한-일 간의 뒤틀린 역사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명관 대 스노베’의 관계는 항상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될 그런 관계가 아니오이까. 아무리 외곽단체라고는 하나 지 교수가 스노베 교수의 출신 모체인 외무성으로부터 상금이 딸린 공훈상을 받았다면 이건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가 아니오이까. <동아일보>가 여기에 대해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스러운 노릇이구요.
얘기 끝에 하나만 더 첨가해야 될 것이 있는데 망설여지면서도, 알아두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쓰기로 하겠소이다.
대중문화 개방의 바람을 타고 지 교수는 특히 일본의 국영방송인 <엔에이치케이>(NHK)에 자주 얼굴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옛날 장준하 선생 밑에서 편집을 도왔다는 <사상계> 잡지를 소도구로 마이크 옆에 놓고서, 시청자에게 ‘시위’를 하더군요. 일본 시청자에게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낯이 간지러워지더군요. 장준하 선생과 동질의 인물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을까요.
문익환 목사가 평양 도착 성명에서 ‘모든 통일은 선’이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대변인(이회성)을 통해 ‘문 목사는 거짓 선지자’라고 매도했다면, 그에 앞서 우리 민족의 고통의 근원이 분단에 있음을 갈파하고 ‘모든 통일은 선인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고 부르짖은 장준하 선생(43회)도 역시 적으로 매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소이까.
장준하 선생이 약사봉에서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는 사이에 목숨을 잃었을 때, ‘반독재 투쟁’을 위해 일본으로 ‘망명’해왔다는 그는 꿀 먹은 벙어리, 일언반구 이에 대해서 발언한 일이 없었소이다. ‘장준하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나’를 집필하여 돌아가시던 해 <세카이>(1975년 12월호)에 발표한 사람은 나, 정경모였지 지명관은 아니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대중문화 개방의 바람을 타고 지 교수는 특히 일본의 국영방송인 <엔에이치케이>(NHK)에 자주 얼굴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옛날 장준하 선생 밑에서 편집을 도왔다는 <사상계> 잡지를 소도구로 마이크 옆에 놓고서, 시청자에게 ‘시위’를 하더군요. 일본 시청자에게 어느 정도의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낯이 간지러워지더군요. 장준하 선생과 동질의 인물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을까요.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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