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 말 동서 독일의 통일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자 베를린으로 날아간 필자(왼쪽)가 당시 독일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작가 황석영(오른쪽)씨와 무너진 장벽 앞에서 함께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20
이제 세계를 뒤흔들었던 격진(激震)의 해, 1989년으로 화제를 돌리겠소이다.
4·2 공동성명을 발표한 그날로 문익환 목사 일행은 평양을 출발해 4월 3일과 4일 이틀을 베이징에 머물면서 물론 천안문 구경도 했는데, 그 앞에 서서 문 목사와 나눈 얘기가 지금 기억에서 떠오르고 있소이다.
언젠가 앞서 글에서 중국의 5·4 운동에 관해 말한 적이 있지 않았소이까. 1차 대전 후 베르사유에서 강화회담이 열렸을 때 영·미 등 서구세력들은 중국을 무시하고 오히려 일본을 두둔하면서 중국에 대한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그대로 들어주는 처사에 분개한 중국인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전민족적인 반제운동으로 퍼져나간 것이 5·4 운동이었소이다.(54회)
그런데 그 5·4 운동은 같은 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반일 3·1 독립운동에 베이징대학 학생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시작된 운동이었으며, 천안문에는 ‘조선의 3·1을 뒤따르라’는 현수막이 나부꼈다는 얘기도 그 글에서 썼는데, 바로 한달 뒤면 5·4 기념행사가 있을 그해 4월 4일 날 천안문 앞에 선 나와 문 목사가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참으로 감회가 깊었던 것이외다.
당시 베이징대학 도서관에서 서사 노릇을 하고 있던 스물여섯살의 마오쩌둥이 꼭 30년 뒤인 1949년 10월 1일, 그 천안문 위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언하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그로부터 다시 40년이 지난 89년 6월, 바로 그 앞의 광장에서 319명의 학생이 희생되는 ‘천안문 학살사건’이 발생한 것이오이다.
나나 문 목사가 두달 뒤면 거기서 그런 참사가 있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으며, 또 그해 11월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가 시작되는 것인데, 베이징의 6월과 베를린의 11월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또 그것이 우리의 남북문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인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고 조바심이 나서, 그때 베를린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황석영씨를 찾아 11월 말께 도쿄를 출발하였소이다.
베를린에 도착해 황석영씨가 묵고 있는 숙소에다 여장을 풀고 그의 안내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물론 그 무너진 장벽이었지요. 벽이 무너졌을 때 거기 사는 동포들이 좋아라 하며 ‘우리는 하나’(Wir Sind Eines Volk)라는 펼침막을 들고 브란덴부르크 거리에서 시위행진을 했다는 얘기도 들었소이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글쎄 과연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곧바로 38선 장벽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이겠는지 참으로 심경이 착잡하더이다.
만일 동서 독일이 통일되는 날이 온다면, 통일은 동독이 아니라 서독의 힘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것은 내가 이미 <찢겨진 산하>에서 예견한 사실이었소이다. 이 결론이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냐 하면, ‘민족의 일체성’을 주장하면서 궁극적인 동서 독일의 통일을 부르짖고 있었던 것은 서독이었으며, 동독은 사회주의 원칙에서 민족이란 개념을 부정하고 오히려 통일에 대한 주장을 거부하는 편이었다는 사실이외다.
동독이 서독의 주장을 거부하기 위해 내놓은 논리는 만일 구태여 ‘민족’이라는 말을 쓴다면 자기네들 동독은 ‘사회주의적 민족’인 반면, 서독은 ‘후기자본주의적 민족의 찌꺼기’일 뿐 언어·문화·습관 내지 인종상의 공통성이 어떻든 간에 ‘두 독일 간의 민족적 일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소이다.(한겨레출판 <찢겨진 산하> 제24장 참조) 그 당시 한국 안에서는 마치 동독의 흉내라도 내고 있다는 듯이 ‘만연히 혈연과 전통을 주장하는 민족주의는 전체가 개인을 억압하는 전체주의’라느니, ‘남북간의 이데올로기적 이질화가 심화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통일이라는 것은 백주몽’이라느니 하는 ‘논객’들의 주장이 횡행하고 있지 않았소이까.
어느 쪽이 자본주의이며 어느 쪽이 사회주의인가와는 관계없이, 외부 세력에 의해 강요된 민족의 분단은 외부 세력에 저항하는 강력한 민족주의의 힘으로밖에 해결될 수 없다는 신념을 더욱 굳히면서 한달 남짓 베를린 체류를 끝내고서 망명객 황석영씨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소이다.
아무튼 89년 11월에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지고, 다음해에는 독일이 통일되었으며, 또 그다음해에는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됨으로써 냉전은 자본주의 체제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는 것인데, 그다음의 문제가 소름 끼치는 것이 아니었소이까. 한반도를 덮치려 했던 1994년 여름의 그 폭풍우 말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동독이 서독의 주장을 거부하기 위해 내놓은 논리는 만일 구태여 ‘민족’이라는 말을 쓴다면 자기네들 동독은 ‘사회주의적 민족’인 반면, 서독은 ‘후기자본주의적 민족의 찌꺼기’일 뿐 언어·문화·습관 내지 인종상의 공통성이 어떻든 간에 ‘두 독일 간의 민족적 일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소이다.(한겨레출판 <찢겨진 산하> 제24장 참조) 그 당시 한국 안에서는 마치 동독의 흉내라도 내고 있다는 듯이 ‘만연히 혈연과 전통을 주장하는 민족주의는 전체가 개인을 억압하는 전체주의’라느니, ‘남북간의 이데올로기적 이질화가 심화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통일이라는 것은 백주몽’이라느니 하는 ‘논객’들의 주장이 횡행하고 있지 않았소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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