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5·4 운동 기념일부터 한달 동안 계속된 베이징의 천안문 사건 당시 천안문광장에 등장한 자유여신상(왼쪽). 베이징중앙미술대 학생들이 만든 동상은 1주일 만인 6월4일 중국 인민군의 진압으로 쓰러져 불태워졌다.(오른쪽)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22
1989년 평양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 문익환 목사가 나와 더불어 베이징에 머무는 동안 천안문 앞에 서서 “중국의 5·4 운동이 우리나라 3·1 운동의 자극으로 일어난 것이었고, 그때 천안문에 ‘조선의 3·1을 뒤따르라’는 현수막이 나부꼈다는 얘기로부터 당시 베이징대학 도서관에서 서사 일을 보고 있던 마오쩌둥이 그로부터 꼭 30년 뒤인 49년 10월 1일 천안문 위에 서서 광장에 모여든 100만 대중을 향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했다”는 감회 깊은 얘기를 나누었던 것이, 꼭 한달 뒤면 5·4 기념행사가 있을 ‘4월 4일’이었소이다. 그날로부터 두달 뒤인 6월 4일, 그 천안문광장에 모여든 100만여명의 군중 속으로 인민해방군, 즉 ‘공산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 왔던 중국군의 탱크가 돌진해 300여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천안문 학살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나나 문 목사나 어떻게 상상조차 할 수가 있었겠소이까.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문익환 목사는 이미 귀국하여 평양을 방문했다는 죄로 형무소에 갇혀서 영어의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으니, 도대체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겠으나, 나는 일본에서 시시각각 흘러들어오는 소식을 들으면서 불가사의하다는 느낌을 어찌할 수가 없었소이다.
5·4 기념일이 다가오자 그 천안문광장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는데, 그중 100만명의 군중은 기념식이 끝난 뒤 각자 흩어져 집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대로 눌러앉은 채 움직이지 않는 ‘싯인’(sit-in) 스트라이크를 시작한 것이었소이다. 그리고 난데없이 그 군중들 속에서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중국 공산당 정권을 비판하는 미국 방송 <미국의 소리>(VOA)가 대대적인 활약을 벌였던 것이외다.
그 싯인 스트라이크는 6월 4일까지 꼭 한달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동안 거기 있던 100만 군중은 무엇을 먹으면서 버티고 있었나 의문이 들었소이다. 가령 쌀로 환산하여 1인분의 식량을 하루 400g으로 치고 100만명이 한달을 견디려면 1만2000t의 쌀이 필요했을 터이니, 누군가가 그만한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미리 짜놓은 계획에 따라 대규모 조직활동을 벌였을 것 아니오이까.
중국 당국은 아마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했겠지요. ‘반제운동’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천안문광장에서 설마 ‘자유의 여신상’을 앞세우면서 반반제운동이라고 할 ‘친미반공’ 운동이 벌어지리라 상상이나 했겠소이까. 베이징 당국은 완전히 허를 찔린 것이지요. 만일 그들이 미리 주중 미국 대사 릴리를 비롯한 미국 쪽 영향을 눈치채고 대책을 강구했던들 군부대가 탱크를 몰고 군중 속으로 돌진하는 우는 범하지 않았겠지요. 그 정도의 소란이라면 소방차를 동원하여 호스의 방수쯤으로 진압할 수가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는데, 어찌되었든 중국이 말하는 미국의 ‘화평연변’(和平演變) 시도는 적어도 중국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것이외다.
1919년부터 꼭 70년이 지난 89년, ‘5·4 운동’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반반제’의 5·4 운동이 ‘자유의 여신상’을 앞세우면서 천안문광장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이 자유의 여신상 뒤에, 이태 전인 87년 서울에서 6월 민중항쟁을 목격하고 베이징으로 부임해 간 릴리도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 다시 한번 역사의 아이러니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소이다.
아무튼 5월 베이징에서 시작된 미국의 화평연변 공작은 중국을 빼고는 대성공을 거두어 우선 8월에는 폴란드가 무너지고,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에 이어, 마침내 11월에는 베를린장벽이 붕괴됨으로써 ‘1989년’이라는 해는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는 것인데, 바로 그 89년에 나와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고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이니,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루어진 평양 방문이 앞으로 어떠한 뜻을 지니게 될 것인지, 또 베이징에서 베를린에 이르는 미국의 세계정책이 우리의 남북문제에는 어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인지, 베를린에서 황석영씨를 만나고 도쿄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사색에 잠겨 고민스러운 심정이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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