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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94년 전쟁위기, 김일성·카터 담판 없었다면… / 정경모

등록 2009-11-25 18:56

1994년 6월 15일 미국 특사 자격으로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전격 방문한 카터 전 대통령(왼쪽)이 김일성 주석(오른쪽)과 회담을 마친 뒤 서해갑문을 시찰하고 있다. 북한 폭격 직전까지 몰고 갔던 1차 북핵 위기를 대화 국면으로 바꾼 역사적 만남이었다.
1994년 6월 15일 미국 특사 자격으로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전격 방문한 카터 전 대통령(왼쪽)이 김일성 주석(오른쪽)과 회담을 마친 뒤 서해갑문을 시찰하고 있다. 북한 폭격 직전까지 몰고 갔던 1차 북핵 위기를 대화 국면으로 바꾼 역사적 만남이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23
지금까지의 기나긴 얘기를 이제 마무리해야 될 단계로 접어들었고 해서, 1989년 11월의 베를린으로부터 94년 6월의 평양으로 무대를 옮겨 보겠소이다. 그해 6월 15일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한사코 말리는 클린턴 대통령을 뿌리치고 독단으로 부인 로절린과 나란히 판문점에서 38선을 넘어 평양을 방문해 다음날 김일성 주석과 더불어 전쟁의 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하지 않았소이까.

만일 그때 협상이 성사되지 않았더라면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나 서울에서만도 100만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터인데, 그때 사태가 얼마나 위급했던 것인지 오래전 일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으나 본국에서 나를 찾아오는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잘 모르고 있더군요. 그래서 이제 먼 기억을 더듬고, 또 내가 내고 있던 잡지 <씨알>의 기록을 살펴가며 그 위기일발의 순간을 펼쳐 보겠소이다.

당시 대통령 클린턴은 북한과 한판 붙어보려는 결심을 굳히고 국방부 장관 윌리엄 페리에게 전투 개시 준비를 명령하였으며, 이에 따라 합동참모본부 의장 존 섈리캐슈빌리, 주한미군사령관 게리 럭 이하 4성 장군 이상의 군 수뇌부 전원을 펜타곤에 소집하고 작전회의를 열었는데, 지금 그때의 기록을 살펴보니 그날은 94년 5월 18일이었소이다.

그날 작전회의에서는 제2한국전쟁에 대비하여 작성된 ‘작전계획 5027’에 의거하여 미군 57만, 전함 200척, 항공기 1200기에다 5척의 항공모함으로 편성되는 전투단을 포함하여 미국이 소유하고 있는 전투력의 반 이상을 투입한다는 상정 아래 면밀한 시뮬레이션이 시행되었는바, 그 결과를 보고 군 수뇌부는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외다. 그 시뮬레이션을 준비한 총책임자인 토머스 플래니건 해군 대령이 “참으로 소름끼치는 것”(extremely sobering)이었다고 술회했다는 것이지요.

다음날, 즉 5월 19일, 페리·섈리캐슈빌리·럭 세 사람이 클린턴에게 보고한 시뮬레이션의 결과를 보면, 개전 뒤 최초의 90일간 미군이 각오해야 할 사상자 수는 5만2000명으로, 미군이 북폭 개시부터 사이공 함락(1965~75년)까지 10년 동안 베트남전쟁에서 입은 피해와 맞먹는 숫자였다는 것이외다. 한국군 사상자는 49만명으로, 이는 60만명으로 알려진 전병력의 8할에 해당하는 것이외다. 평양 시민의 피해는 기록에 없으나, 서울의 민간인 사망자 규모는 자그마치 100만명으로 추산되어 있었소이다.

더욱 큰 문제는 한국과 일본에 산재한 원자력발전소였는데, 이것이 단 몇 기만이라도 폭격을 받아 파괴됐을 때의 참화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며, 전쟁을 수단으로 하는 문제의 해결은 어렵다는 것이 클린턴이나 군 수뇌부가 도달한 결론이었다는 것이오이다. 그래도 클린턴은 북한을 굴복시킬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으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이외다. 바로 그때 카터가 김 주석을 만나 협상을 개시한 끝에 참으로 극적으로 평화적 해결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졌던 것이외다.

그때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서서 김 주석은 얼마나 가슴이 떨렸겠소이까. 그때 김 주석이 여든두 살이었었는데, 결국 그 심려에 의한 체력의 소모 때문이었겠지요. 협상이 끝나고 카터가 평양을 떠난 지 불과 며칠 뒤인 7월 8일 김 주석은 묘향산 산장에서 숨을 거두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1994년이라는 해는 나 개인적으로서도 다사다난했소이다. 우선 1월 18일 서울의 문익환 목사가 갑자기 돌아가시지 않았소이까. 스스로를 문민정부라고 부르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 옥에서 풀려난 문 목사가 뭔가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고자 준비에 몰두하고 있던 중 별안간에 닥쳐온 불행이었소이다. 당신이 시작하는 사업의 첫번째로 내가 일본말로 출판했던 <찢겨진 산하>의 해적판이 아닌 우리말판을 내겠으니 서둘러서 원고를 작성해서 보내라고 또랑또랑 힘있는 말소리로 내게 전화를 하신 것이 돌아가시기 불과 닷새 전이었소이다. 그때 나이 일흔여섯이었고요.


문 목사의 추도식은 3월 1일 박용길 아주머님과 막내아들 성근씨의 참석 아래 도쿄시내 야마노테교회에서 거행되었는데 그 뒤 얼마 안 된 6월 10일 나는 뇌경색으로 쓰러졌고, 7월 8일 입원하고 있던 병원에서 김 주석 서거 소식을 들었소이다. 문 목사도 가시고 이번에는 내가 갈 차례로구나 했지요. 그때 내 나이가 꼭 일흔이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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