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5월18일 북한 폭격 결심을 굳히고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과 군 수뇌부에게 전투 개시 준비를 명령했던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제2의 한국전쟁’ 주역이 될 뻔한 고비를 넘기고 97년 9월 퇴역하는 존 섈리캐슈빌리 합동참보본부 의장을 격려하고 있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24
앞서 얘기는 1994년 6월 위기일발,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전쟁의 위기가 회피되었고, 결국 그때의 심사초려(深思焦慮)의 고통으로 김일성 주석이 타계하게 된 경위를 간추려서 서술한 것인데, 여기서 다시 한번 한반도의 정세는 항상 중동사태와 연동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주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79년 이란에서 일어난 호메이니혁명의 격동 속에서 박정희 암살극이 벌어지고, 또 그 연장선상에서 5·18 광주항쟁이 발생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적이 있소이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다시 한번 북한과 맞붙어 한국전쟁을 일으키려고 했던 동기도 결국 그 당시의 중동사태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므로, 여기서 무대를 94년 6월의 평양에서 89년 베를린으로 되돌려 베를린장벽의 붕괴가 결국 어떻게 해서 전쟁의 위기를 한반도로 몰고 왔던 것인지 그 경위를 탐색해보고자 하는 바이외다. 중국이 말하는 화평연변(和平演變), 즉 무력을 쓰지 않고서 사회주의 정권을 붕괴시키는 정치공작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대성공을 거두지 않았소이까.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다음해에는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형태로 독일의 통합이 이루어졌으며, 그다음해 소련 자체가 소멸되어 겨우 독립국가연합(CIS)의 형태로 그 잔재를 남겼을 정도로 냉전에서 미국의 승리는 결정적인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세계 제패를 추구하는 미국이 여기서 만족할 수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겠지요. 실제로 무력을 발동하지 않고서는 무너뜨릴 수 없는 상대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지요. 세계제국인 미국은 이른바 ‘윈윈 작전’으로 동서 양극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더라도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군비를 갖추는 것이 목표였는데, 윈윈의 서쪽 상대는 이라크였고 동쪽의 상대는 북한이었소이다. 미국으로서 이라크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적대세력인 까닭에 눈엣가시였던 것이고, 북한이 미웠던 것은 일본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까닭이 아니겠소이까. 후세인의 이라크를 상대로 미국이 제1차 이라크전쟁(걸프전)을 시작한 것은 91년 1월 17일이었소이다. 90년 8월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뒤 철수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던 까닭에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폭격을 시작한 것인데, 이 전쟁은 폭격 개시 42일 만인 2월 28일 후세인의 굴복으로 간단히 종결되었으니 미국으로서는 자기의 막강한 군사력에 자신을 가질 만도 하지 않았겠소이까. 미국이 다음 목표로 북한을 노리게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추세였다고 봐야겠지요. 서양사에는 중세기 영국-프랑스의 ‘100년 전쟁’이라는 것이 있어 이것이 가장 지겹고 끈질긴 전쟁의 예로 알려져 있으나,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강토에서 60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온 북-미의 각축은 이 얼마나 지겹고 끈질긴 전쟁이오이까.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전제로 하는 군사훈련인 팀스피릿을 연례 행사로 개시한 것은 사이공(호찌민)이 함락된 다음 해 76년부터였소이다. 1차 이라크전쟁의 경험으로 핵무기를 안 쓰고 재래무기만으로도 너끈히 북한과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미국은 92년 단 한 번 팀스피릿을 중지한 적이 있으나,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93년부터는 재차 연례 팀스피릿이 시작되어 94년의 위기를 불러온 것이었소이다.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상대방에 대해서는 핵무기에 의한 선제공격은 하지 않겠다는 것을 그래도 소련은 대외적인 약속을 통해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었으나, 미국은 한번도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놓은 일이 없었소이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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