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전쟁을 전후해 냉전과 한반도 정책을 주도한 두 인물,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가운데)과 국무장관 애치슨(오른쪽).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37
6·25전쟁이 터지고 나서 60년이 되는 내년쯤에는 어떻게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지는 않겠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때이니만치 300만~400만명의 인명이 희생되었다고 하는 그 참혹한 전쟁이 이 땅에서 무슨 까닭으로 일어났을까, 김일성이가 또는 이승만이가 제1발을 쐈기 때문이라는 단세포적인 사고를 벗어나 좀더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소이다.
미 국무부 안에 조지 케넌을 부장으로 하는 정책기획본부가 설치된 것은 우리가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좋아 날뛰고 있던 1947년이었는데, 케넌의 첫 작업은 한반도를 일본의 재지배에 맡긴다는 이른바 ‘케넌 설계도’의 작성이었소이다.(88호) 이것은 조선인을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독립국가의 국민으로 만들겠다던 카이로선언(1943년 12월)의 약속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국토를 전쟁으로 유린하겠다는 괘씸하기 짝이 없는 구상이었지만, 미국에는 그것이 정의였던 것이외다.
해방 직후였던 당시 미국이 조선을 일본의 재지배에 맡기겠다는 정책을 밀고 나갔다는 것이 퍽 기이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베트남에 옛 종주국인 프랑스를 불러들여 통치를 맡기겠다는 것이 당시 미국의 정책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케넌의 구상이 그들로서는 그렇게 몰상식한 것이 아니었겠지요. 그리고 또 한국전쟁은 냉전이 돌연 열전으로 변한 전쟁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거의 상식으로 되어 있으나 해방되던 해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가해진 원폭 공격은 5년 뒤에 올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것이며, 원폭 공격 때부터 한국전쟁까지의 냉전은 열전과 열전 사이의 공백기에 불과하였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외다.
얄타회담 때(1945년 2월) 미국은 일본을 항복시키자면 소련의 힘이 필요하다고 느끼면서 독일 항복 이후 3개월이 되면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하도록 밀약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인데, 히틀러가 자기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것이 그해 4월 30일이었고 독일이 정식으로 항복한 날짜는 5월 6일이었으니, 왜 하필이면 미국은 8월 6일과 9일을 택해서 일본의 두 군데 도시에다 원폭을 떨어뜨렸겠소이까. 그해 7월 원폭실험에 성공한 미국은 이미 소련의 힘은 필요없다는 판단 아래 소련에 힘을 과시할 목적으로 두 차례 원폭공격을 감행한 것이니, 그것은 2차대전의 종식을 고하는 신호가 아니라 새로운 열전의 개시를 고하는 폭음이었다고 나는 믿고 있소이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은 독일 항복으로부터 3개월이 되는 날이었고, 나가사키가 공격의 대상이 된 8월 9일은 소련군이 실제로 국경을 넘어 만주로 쳐들어온 날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6일과 9일이라는 날의 선택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소련과의 대결에서 무력행사를 불사하겠다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것이 47년 3월 12일이었으며, 무력충돌을 기정사실로 보고 군사비를 거의 무제한으로 지출하겠다는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NSC-68’을 트루먼이 승인한 것이 전쟁 발발 직전인 50년 4월 12일이었는데, 미국이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이었겠소이까. 전해인 49년 8월 29일 소련은 원폭실험에 성공하였으며, 10월 1일 장제스의 국민군을 물리친 해방군 마오쩌둥은 천안문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였으니, 트루먼이 때는 왔노라고 느꼈다 해도 무리는 아니었겠지요.
이제 끝으로 조선반도는 미국 방위선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 그 유명한 ‘애치슨 선언’(1950년 1월 12일)이 무엇이었나 나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하오이다. 이것이 작전상의 속임수가 아니었다고 아무리 미국이 오리발을 내민다 해도 별로 설득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으나, 나는 그보다도 더 큰 의미가 여기에 감춰져 있었다고 믿고 있는 바이외다.
조선반도가 미국 방위선 안에 없다는 것은 막상 전쟁이 터졌을 때 미국은 성조기를 앞세운 미군이 아니라 국가연합기 아래의 유엔군으로 싸우겠다는 뜻일 것인데, 앞서 글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33호) 소련이 거부권을 쥐고 있는 이상 ‘헌장 제7장’이 규정하는 유엔군의 편성은 불가능한 것이었고, 미국은 전쟁이 터진 뒤인 7월 7일 소련이 빠진 안보리에서 ‘S/1588’을 편법으로 통과시켜, 유엔군의 이름을 도용하게 되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 문서가 언제쯤 작성되어 있었겠소이까? 당시의 국무장관은 딘 러스크였고 유엔 사무총장은 트뤼그베 할브단 리였는데, 그는 미국의 말이라면 소금섬을 물로 끌라 해도 마다하지 않을 철저한 친미파였소이다. 러스크와의 사이에는 암묵적인 양해가 성립되어 있어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S/1588’은 작성되어 있었을 터이며, 미국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서 6·25를 맞이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는 바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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