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와 부인 지요코가 어느해 설날 한복을 차려입고 손주들과 함께했다. 뒤쪽은 맏아들 정강헌씨의 딸과 아들, 앞쪽은 둘째아들 정아영씨의 아이들이다.
정경모-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 139
그러니까 그게 아마 참여정부가 들어선 2003년쯤의 일이었겠는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계시던 박형규 목사님께서 여러차례 전화를 걸어오셨소이다. 박 목사께서는 나보다 한 살 위이시고 말하자면 형님뻘 되시는 분인데, 사는 곳 영사관으로 출두하면 아무 소리 안 하고 여권을 발급해줄 터이니 한번 고국 여행을 하라는 말씀이셨소이다. 그래서 국적이 한국인 아내도 함께 요코하마영사관으로 출두하지 않았겠소이까.
출두한 날 미리 알려놓았던지 ‘기소유예’ 신분인 나에 대한 취조 때문에 서울서 출장 나온 수사관 3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그들은 내가 어떤 감언이설로 꼬였기에 그 순진무구한 문 목사가 마치 몽유병에라도 걸린 듯이 그렇게 순순히 나를 따라서 빨갱이들의 소굴인 평양에 겁도 없이 발을 들여놓았을까, 그 불가사의한 미스터리의 진상을 캐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겠소이까.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한들 그들을 납득시킬 수가 있었겠소이까. 도저히 납득해 주리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나와 문 목사는 벌써 몇십년을 거슬러 올라가 기이한 인연으로 만났다는 것, 옆에 앉아 있는 아내를 가리키며 우리 부부가 결혼식을 올릴 때 주례를 서주신 분이 바로 문 목사였다는 것, 오랜 동안 같은 길을 걸어온 친구며 동지였다는 것을 정성껏 설명했소이다. 그리고 또 내가 일본에서 열어온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회와 따님 연구씨가 평양으로부터 보내온 전보에 관한 얘기, 6월 민중항쟁 때 문 목사가 직면했던 상황, 시민들의 격앙된 감정을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나와 문 목사가 도달했던 의견의 일치 등, 둘이서 평양 방문을 결심했을 때의 상황을 되도록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했소이다. 문 목사의 별호가 옛날부터 ‘문고집’이었는데 누가 감언이설로 꼬였다고 해서 38선을 넘어 평양에 갈 양반인가, 당신들은 문 목사의 지성과 정열에 대해서 과소평가 정도가 아니라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문도 하였소이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다음날 다시 한번 오라고 합디다. 하라는 대로 다음날 또 한번 출두했소이다. 그랬더니 자기들이 미리 작성해 두었던 서류를 내게 내밀면서 서명을 하라고 그럽디다. 서명을 하면 여권을 내주겠다는 것이지요.
그 서류는 ‘자수서’라고 되어 있고, 평양 방문은 실정법을 어긴 범죄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이러저러하게 행동할 것을 서약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소이다.
‘자수서’라는 것은 간첩에게 쓰는 말일 터이고 내가 스스로 간첩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인데, 이건 보통 ‘준법서약서’보다도 더 고약한 내용이 아니오이까. 여기에다 서명을 한다면 스스로 자기 존재를 짓밟는 것이며, 또 문 목사가 취한 행동을 범죄행위였다고 인정하는 것이 되지 않겠소이까. 아무리 초야에 묻혀 사는 이름없는 필부라 할망정 삼군(三軍)의 힘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뜻(志)이 있다는 말이 있소이다.(<논어>) 나는 그것을 수사관에게 돌려주고 밖으로 나왔는데 무슨 뜻인지 영사가 손수 운전하는 자기 차에다 나를 태워 역까지 바래다주었으며, 영사관 직원들이 모두들 나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배웅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소이다.
이듬해 봄 아내와 더불어 근처 다마가와 강변의 둑으로 벚꽃 구경을 갔소이다. 2㎞가 넘는 둑길을 꽉 메우도록 벚나무가 양편에 서 있어 철마다 화려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꽃구경으로는 맞춤한 곳이오이다. 화창한 봄날이었고 둑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마가와의 맑은 물이 흐르고 있으며 또 상류 쪽으로 멀리 단자와 산맥의 수려한 봉우리들이 서 있는 풍경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다가오더이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한강의 푸른 물결과 어릴 적 뛰놀던 양말산의 아지랑이 깔린 넓은 벌판이 떠오릅디다. 그 순간 나는 나란히 서서 다마가와의 풍경을 보고 있던 아내 지요코에게 말했소이다.
“여보 여보, 난 한국에는 안 가. 여기서 죽어 당신하고 같이 일본 땅 흙이 되는 거야.”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여보 여보, 난 한국에는 안 가. 여기서 죽어 당신하고 같이 일본 땅 흙이 되는 거야.”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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