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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우리들의 부모님’ 오늘도 묵묵히 들로

등록 2009-12-24 18:57수정 2009-12-29 16:00

영화 <워낭소리>의 주인공 최원균-이삼순 노부부가 경북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 집에서 소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봉화/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영화 <워낭소리>의 주인공 최원균-이삼순 노부부가 경북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 집에서 소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봉화/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허리 더 휘고 무릎 더 시려도
할아버지-젊은소 쉼없는 동행
“먹으면 나가, 못말린다니까”
할머니 정겨운 타박도 여전
2009 사람들 ⑤‘워낭소리’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소

영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러 경북 봉화로 찾아간 지난 23일, 하늘은 낮은 자세로 내려와 있었다. 미처 떨어지지 못하고 얼어붙은 상수리나무 이파리들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비를 맞았다. 평일의 고속도로는 한산했고, 취재 차량은 약속 시간을 1시간이나 앞질러 하눌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들머리에서 사람보다 먼저 사람을 맞은 것은 군청이 세운 워낭소리 푯말이었다. ‘워낭소리 로드, 소무덤 400m’. 영화 속에서 할아버지가 소에게 먹일 ‘꼴’을 베던 밭 한쪽 구석에 ‘늙은 소의 무덤’이 있었다. “30년간 할아버지와 동고동락한 소의 마지막 안식처.” 푯말 사진 속의 늙은 소는 허벅지에 제 똥을 잔뜩 묻힌 채 절룩거리며 걷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녔는지, 밭 한가운데로 길이 생겼다.

#동지팥죽 최원균(81) 할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만날 나무하러 가요. 그 사람은 들에 사는걸요. 날만 새면 나가요. 못 말려요. 어릴 때부터 일만 해서 다리가 이런 데도 나가요.” 이삼순(78) 할머니는 검지 손가락을 곧게 펴서 땅을 향하게 하며 할아버지의 불편한 다리를 흉내냈다. 할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할머니의 언성이 높아졌다. 할머니의 허리는 영화 속에서보다 더 휘어 보였다. 무릎에 두 손을 대지 않고서는 서 있기조차 힘들어했다. 한 시간가량 지났을까. 할아버지가 소달구지에 땔나무를 한 짐 싣고 왔다. 할머니는 얼른 일어섰다. “나무 내리니껴?” “뭐?” “나무 내라?” “…” 할아버지의 귀는 영화 속에서보다 더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영화 속 젊은 소는 이제 중년이 되어 세번째 임신을 했다. 나무를 내리고 난 할머니는 점심을 준비했다. 할아버지는 위장복 무늬 모자를 벗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앉아서 쉴 때 할아버지는 한 폭의 정물화 같았다. 할머니는 동짓날 쑤었다며 팥죽을 내왔다. 할아버지가 방에서 팥죽을 먹을 때 소는 마당에서 사과를 먹었다. 할아버지는 옆방에서 팥죽을 먹는 취재진에게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비로소 말했다. “죽을 드셔서 되니껴?”

#서울구경 <워낭소리>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을 흔들어 놓았다. 주말이면 관광버스 넉대가 한꺼번에 들이닥치기도 했다. 마구 들어와 방문을 열어보는 관광객도 있었다. “별사람 다 있어요. 귀찮아도 사람 사는 집에 사람 오는 걸 막을 수가 있나.” 할머니는 힘들어하면서도 심심한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할아버지는 놀러도 안 가요. 소여물은 누가 주냐고, 다른 데다 매어놓으면 똥은 누가 치우냐고.” 봉화군수와 함께 <워낭소리>를 보러 가는 날도 할아버지는 가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여행 다니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던 할머니의 꿈은 내년에도 이뤄지기 힘들 것 같았다. 지난달 방송 출연을 위해 서울에 간 것이 할아버지 생애 첫 서울 나들이였다. “서울 구경도 안 하고 죽어? 그렇게 나대 놓았더니” 겨우 갈 수 있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봉화 인터넷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큰아들이 점심시간을 틈타 잠시 들렀다. 아들은 아버지가 쌓아놓은 땔나무를 가리키며 “나무 사다 줄 테니까 하지 말라고 해도 듣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수원에 사는 넷째아들은 지난여름 ‘아버지’라는 노래로 가수가 됐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담은 노래다. 할머니는 “우리 자식만한 애들이 없다”며 9남매 자랑을 했다.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이례적으로 흥행할 수 있었던 건 부모님에 대한 이 시대 모든 자식들의 미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시 생활에 지쳐 어머니 아버지를 잊고 살던 중년의 자식들은 때늦은 사과 편지를 쓰는 심정으로 영화관을 찾았다. 사위어 가는 농촌의 마지막 풍경을 지탱하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렇게 이 시대 부모님의 상징이 됐다.

#다시들로 식사를 마친 할아버지는 댓돌에 걸터앉아 담배 한대를 피운 뒤 다시 달구지에 올라탔다. 구름 사이로 기어이 비친 햇살이 툇마루 모서리에서 부서졌다. “먹으면 가요. 못 말린다니까.” 할머니의 언성이 다시 높아졌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로 소의 엉덩이를 때리자 소는 걸으면서 똥을 쌌다. 집으로부터 2㎞가량 떨어진 야산 밑에 달구지를 세워두고, 할아버지는 나무를 했다. 달구지가 서 있는 밭에 거름으로 뿌려놓은 인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할아버지는 무릎걸음으로 산비탈을 걸어서 작은 떨기나무들을 쳐낸 뒤, 노끈으로 묶은 다음 아래로 굴렸다. 영화는 끝났지만 삶은 계속된다. 할아버지는 몸으로 말했다. <끝>

글·봉화/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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