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0월 상하이임시정부 내무총장이던 도산 안창호 선생(왼쪽)은 할아버지 김가진 일행의 망명 안내인으로 이종욱(오른쪽)을 서울로 파견했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4
대동단은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조직을 지향했다. 모든 단원을 황족·진신단(縉紳團)·유림단·종교단·교육단·청년단·군인단·상인단·노동단·부인단·지방구역 등의 11개 지단으로 나누고, 각 부의 조직책을 총대라고 불렀다. 정남용이 종교단 총대를 맡았고 유림단은 이기연과 이내수, 상인단은 양정, 청년단은 나창헌, 군인단은 유경근, 노인단은 김상열, 부인단은 이신애 등이 맡았으며, 나머지는 나중에 충원하기로 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한강의 ‘뱃놀이 창립총회’에서 두암 전협이 단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정신적 지주요 상징적 인물’을 총재로 하자고 하여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을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할아버지를 설득하고자 두암이 그의 오랜 동지이자 나의 외삼촌인 입재 정두화를 대동하고 종로 체부동의 우리집에 찾아온 날을 어머니(정정화)는 기억하고 있었다.
대동단의 재정은 단원 중 여유가 있는 권태석이 사재를 내놓기도 했으며, 그 외에 재력가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전계 장현식은 3000원을 기부한 것이 발각되는 바람에 일제 경찰에 잡혀 징역형을 살기도 했다. 전계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대지주였는데, 민족운동을 위해 사재를 아끼지 않아 보성전문과 중앙고보 등 교육사업에도 많은 금액을 기부했다. 전계의 어마어마한 토지는 그렇게 쓰여 해방 뒤 토지개혁 대상조차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계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관되어 투옥당하기도 했다.
대동단은 창립 한달 만인 1919년 5월 하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3·1독립선언으로 전국에 파급된 시위가 5월 즈음에는 상당히 수그러들었다. 대동단에서는 그 열기를 북돋기 위해 ‘시국을 관망하는 공론자에게 경고함’과 ‘등교학생 제군에게’ 등의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권태석·최익환·이능우 등이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밤낮없이 계속된 고문에도 불구하고 배후를 끝내 밝히지 않았으며, 자신들만의 행위라고 주장하여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돼 대동단의 활동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대동단 본부를 국외로 이전하는 문제가 논의된 듯하다. 대동단에서 언제 할아버지의 망명을 결정하였는지는 몰라도 일경의 정남용 신문조서에 “사무소는 조선 땅에 있으면 위험하기 때문에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그곳의 중요한 사람으로 주무에 충당하며…”라는 대목이 있어 국내에서 본부가 발각됐을 때를 대비해 이전이 논의됐던 것이 명백하다.
이런 배경에서 할아버지의 망명이 결정되었는데, 이것은 한국의 “왕실과 지배층은 일한합방을 지지했다”고 주장해온 일제의 선전과는 정면으로 반대되기 때문에 특히 뜻있는 일로 판단됐을 것이다. 자료를 보면, 할아버지는 망명을 결정한 뒤 대한자강회 당시의 동지인 안창호 임정 초대 내무총장에게 연락했고, 임정에서는 안내할 사람으로 이종욱을 파견했다.
일경의 신문조서를 보면 대동단에서는 임시정부 창립 주역의 한 사람이며 역시 한말 대한자강회의 동지인 예관 신규식을 외교주무로 선출한 기록이 있다. 예관을 국외총책으로 추천한 것은 아마도 내 외삼촌 입재일 것으로 믿어진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으며, 예관이 망명할 때 입재가 여비를 보태기도 하였고, 그 후에도 서신연락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할아버지가 망명하기 넉달 전인 19년 6월, 예관은 상하이 서남쪽 항저우에서 투병중이었는데, 병원비를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와서 두암과 입재는 믿을 수 있는 단원 김용환을 상하이로 파견하기로 했다.
일제의 대동단 사건 ‘예심종결결정’을 보면, 7월 중순 “전협은 김가진과 협의한 뒤 신규식이 그곳에서 조선독립운동을 선동할 목적으로 신문을 발간하려는 계획을 원조하기 위해 장현식으로부터 제공받은 돈 3000원 중 1500원을 경성부 체부동 김가진의 집에서 김용환에게 교부하였으며, 그는 이를 상하이에 가지고 가 신규식 등이 계획한 ‘독립’이라고 제목한 출판물의 자금으로 제공하였고…”로 나와 있다. 김용환은 항저우에서 예관을 만난 뒤 그곳에서 콜레라에 걸려 병사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일제의 대동단 사건 ‘예심종결결정’을 보면, 7월 중순 “전협은 김가진과 협의한 뒤 신규식이 그곳에서 조선독립운동을 선동할 목적으로 신문을 발간하려는 계획을 원조하기 위해 장현식으로부터 제공받은 돈 3000원 중 1500원을 경성부 체부동 김가진의 집에서 김용환에게 교부하였으며, 그는 이를 상하이에 가지고 가 신규식 등이 계획한 ‘독립’이라고 제목한 출판물의 자금으로 제공하였고…”로 나와 있다. 김용환은 항저우에서 예관을 만난 뒤 그곳에서 콜레라에 걸려 병사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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