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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간토대지진때 군대자료에 ‘일 정부 학살관여’ 증거

등록 2010-01-06 22:22

강덕상 재일한인 역사자료관장은 “절반과 절반이 싸우면 4분의 1밖에 안 되니 차별과 멸시를 받는다”고 말했다. 도쿄/김효순 대기자 <A href="mailto:hyoskim@hani.co.kr">hyoskim@hani.co.kr</A>
강덕상 재일한인 역사자료관장은 “절반과 절반이 싸우면 4분의 1밖에 안 되니 차별과 멸시를 받는다”고 말했다. 도쿄/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2010 특별기획 성찰과 도전] 경술국치 100년 새로운 100년
④ 강덕상
재일 원로사학자인 강덕상씨의 일본 생활은 두 살 때인 1934년 12월 어머니 등에 업혀 대한해협을 건너면서 시작됐다. 임신중인 각시를 두고 떠났던 아버지가 가게 점원 등 고용살이를 거쳐 도쿄의 고물상 부락에 자리잡고 가족을 부른 것이다. 청소년기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이겨내고 뿌리 찾기를 위한 역사 연구에 들어간 그가 오랜 강사생활을 거쳐 히토쓰바시 대학의 교수로 취직한 것은 1989년 4월이다. 한국 출신 학자가 국립대학 교수로 채용된 적은 있지만 재일동포로서는 그가 처음이다. 20대의 젊은 시절 함께 공부했던 일본인 동료들이 자리를 찾아 떠나가는 것을 지켜만 보다가 은퇴를 생각할 늘그막에 강사에서 바로 교수가 된 그의 역정은 식민지 출신이 옛 종주국에 남아서 겪었던 고단한 삶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국의 분단으로 둘로 갈라진 동포사회에서 강제연행의 역사를 파헤치고 민족교육을 통해 후세에 전달하는 것은 오랜 기간 총련의 전유물이었다. 민단계 학자로 분류되는 그의 활동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운 불균형을 바로잡는 구실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식민지 지배 폐해를 지적할 때 일본 사회가 받아들이는 방식은 비판 주체가 일본인이냐 재일동포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가설을 세우더라도 더 실증적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뼈저리게 느꼈다. 현재 재일한인 역사자료관장으로 있는 그를 지난해 11월4일 만났다. 악조건 속에서 분투해온 그는 국내의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언동에 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 학자가 일본에 와서 강연을 하면서 “한국인이 백화점에서 상품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일제 때였다”고 태연히 말해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총련 전유물 재일 한민족사
민단 시각서 불균형 보완해


-어렸을 때 ‘황국소년’으로 자랐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가?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차별이 있었다. 집에서 고물수집상을 했는데 폐지·고철 등을 모아 오는 사람이 10명 정도 있었다. 하루 벌어 먹고사는 이들이라 저녁에 모이면 음주와 화투를 하고 싸움을 자주 했다. 그러니 주변의 일본인들이 조선인은 시끄럽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일본인 친구 집에 가면 모친이 교양 있는데다 가정교육도 잘돼 있어 분위기가 달랐다. 그러니 일본 아이들과 싸움을 해도 주먹으로는 이기지만, ‘조선놈’이라는 소리만 들으면 기가 팍 꺾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육군유년학교나 해군병학교에 입대한 학교 선배들이 제복을 입고 나타나 자랑을 했다. 그것이 굉장히 멋있게 보여 군인이 돼야 차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2학년 때 공습이 심해져 미야기현의 중학교로 소개됐다가 해방을 맞았다. 동포들이 일장기에 덧칠해서 만든 태극기를 그때 처음 보았다.”

-와세다대학교 1학년 때 퇴학 처분을 당했다고 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1950년에 입학을 했는데 점령군사령부의 공산당 추방(레드 퍼지)과 6·25전쟁으로 매일 집회가 열리고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이 원자폭탄을 쓴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세계평화옹호대회가 50년 3월 ‘스톡홀름 어필’(최초로 원자병기를 사용하는 정부는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자이며 전범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취지)을 발표했다. 세계평화의 중심이 조선이라고 얘기되던 때였다. 집회에 나갔다가 체포돼 퇴학 처분을 받았다.”


-민족단체에 가입하지는 않았나?

“일본학교를 쭉 다녀 우리말이 서툰데다 용기도 없었다. 그쪽 활동가들은 우리말과 글을 눈부시게 잘해서 나를 동료로 받아들여줄지 고민했다.”

미 군정, 일본서 수집 자료에
간토대지진때 군대활동 나와

-가쿠슈인대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있는 미야타 세쓰코가 본명 선언(스스로 한국인임을 밝히는 것)의 현장에 있었다고 하던데?

“지금 되돌아보면 아무 생각 없이 대학에 들어가 집회에서 거물들 옆에 있다가 체포됐다. 역시 대학에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반성을 했다. 교수회의에서 체포됐다고 무조건 퇴학 처분을 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결의가 있어 1년 후 복학을 했다. 대학 강의는 정말 재미없고 배울 게 하나도 없었다. 중국연구회에 들어가 외부의 저명한 분을 모시고 공부했다. 당시 중국이 세계를 움직인다는 풍조가 있었다. 그런 모임의 자리에서 사실은 조선인이고 앞으로 조선사를 연구하겠다고 밝혔다. 그때까지 일본 이름을 쭉 썼기 때문에 주변의 학생들은 나를 다 일본인으로 생각했다.”

-그런 결심을 한 계기가 있었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당시 조선근대사 연구의 중심이었던 야마베 겐타로(1905~1977. 일제 때 좌익노동운동으로 복역, 패전 후 석방)를 만났는데 “너는 조선 사람인데 왜 중국사를 하느냐”고 묻더라. 학계의 기인이었던 그는 “일본의 근대는 조선 식민지지배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조선은 일본을 보는 거울이다”라며 “일본에 있는 너희들이 조선사를 해야 의미가 있다”고 했다.

또 하나는 대학 선배의 부친으로 도쿄대 교수였던 이데 다카시(1892~1980. 고대 그리스철학 전공, 아리스토텔레스 전집 편찬)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더니 <어느 철학청년의 수기>라는 자신의 책을 주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고등학생이었던 그가 쓴 일기 내용이 있었다. 일본 전체가 조선인 배척을 떠들고 있을 때 이토는 조선에 원죄를 지었으며 조선인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썼더라. 일본인 중에도 이렇게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큰 자극을 받았다.”

-식민지 조선 출신 관료들의 모임인 우방협회와 젊은 학생들이 1958년에 함께 만든 조선근대사료연구회에 처음부터 참석을 했는데 실제로 연구에 도움이 됐나?

“많이 배울 수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아는 게 없고 공부가 부족한 상태여서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정무총감을 비롯해 실제 정책을 입안하거나 집행했던 관계자들이 강사로 많이 나왔다. 당시는 조선인 대학생들의 학도병 동원이나 몽양 여운형의 활동에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해 그런 내용을 질문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50년대 후반에는 일반 대학에서 조선사 강좌를 두고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가지무라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인 학생 참가자들은 근대사료연구회에 나오면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후 일본의 조선 연구는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 조선에 원죄”
도쿄대 교수 저서에 큰 자극

-우방협회 이사장이었던 호즈미 신로쿠로는 노회한 식민주의자는 아닌가?

“아니다. 식민지 관료 시절에는 여러 가지 했겠지만 인간성은 좋은 사람이다. 나는 대학선생한테는 하나도 배운 것이 없지만, 이 사람은 내 은사다. 왜냐하면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과 관련해 발표를 하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며 네 차례 다시 하게 했다. 요미우리신문 사장을 지낸 쇼리키 마쓰타로(1885~1969) 등 사건 당시 경찰 고위층이었던 이들에게 소개장을 써주며 가서 직접 얘기를 들어보라고 했다. 결국 면담을 거부당하기는 했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내용이 훨씬 탄탄해질 수 있었다. 일본인을 비난하는 조선놈이라고 경계하는 의식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아양 부리는 조선 사람이 싫다고 했다.”

-우방협회 사람들과 갈등은 없었나?

“경무국장을 지낸 하라다 다이키치는 ‘너희들 여기 오지 마라’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나중에 얘기 들으니 상하이에 가서 독립운동을 단속할 때 총에 맞았다고 하더라. 탄환이 가슴에 남아 있어 이따금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5·16 쿠데타 뒤 한-일협상 관계로 우방협회를 찾는 한국인 손님들이 늘었다고 하더라.

“한국전력 사장을 지낸 사람이 와 일본인에게 ‘각하, 각하’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일제 때 상사였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협상 창구를 찾으려고 하는지 한국에서 사람들이 많이 왔다. 그러면 우방협회 간부들은 이케다 내각(60년 7월부터 64년 11월까지 존속. 이케다 하야토는 박정희가 61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방미길에 도쿄에 들러 만난 일본 총리)의 아무개를 찾아가면 잘해줄 것이라고 얘기했다. 일제 때 박정희를 직접 가르쳤다는 한 일본인은 한국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칡 재배방법을 알려주는 편지를 박정희에게 보냈다고 자랑을 하더라. 대표적 친일파였던 박춘금도 자주 와 전직 정무총감들과 어울렸다. 민단에서도 상대를 해주지 않으니까 도쿄 우에노에서 여관을 하다가 죽었다. 조선인 비시(BC)급 전범들도 찾아왔다.”

3·1운동 보복으로 ‘재일 조선인 조직적 살해’ 판단

-전범으로 몰렸던 조선인들은 먹고살기 위해 택시회사 면허를 받게 해달라고 했다던데?

“그랬을 것이다. 그때는 전범이라는 선입견이 있어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공화당 국회의원을 하다가 69년에 간첩혐의로 체포돼 처형됐던 김규남도 가끔 세미나 모임에 나왔다고 하던데 맞는 얘긴가?

“그는 메이지대학에 왔다가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우방협회 모임에서 같이 공부한 적이 있다. 그가 경제사 원로인 최호진 교수가 왔다며 나하고 가지무라 히데키에게 같이 가서 만나자고 했다. 마루노우치의 한 호텔로 찾아가는데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호텔에서 나와 우방협회로 가는데도 계속 미행을 했다. 한국의 기관원으로 생각했다.”

-시기적으로 어느 때인가?

“아마 62, 63년이었을 것이다.”

-그때라면 국교 정상화 전이라 공관이 정식으로 설치되지 않았는데 기관원이 활동했다는 말인가?

“그럴 것이다.”(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때 실행 주범의 하나였던 김동운 당시 일본대사관 서기관도 수교 이전에 신문사 특파원으로 위장해 일본에서 활동했다)

한일수교전 근대사 연구할때
한국기관원 추정 인물이 미행

-학문의 길로 가면서 연구 방향은 어떻게 잡혀 갔나?

“당시는 경제사가 마치 역사 연구의 핵심이라는 풍조가 있어 화폐 분야를 하다가 총련계 연구자인 박경식(1922~1998)을 만났다. 65년에 나온 <조선인 강제연행의 역사>를 쓴 사람이다. 그는 재일동포들이 일본에서 생존할 수 있는 역사적 권리를 갖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역사 공부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말하고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나는 필요성은 공감했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60년인가 61년인가 국회도서관에 갔더니 알고 지내는 사서가 미국에서 ‘반환자료’ 가 왔으니 한번 보라고 했다. 미국이 일본 점령 때 가져갔던 자료를 마이크로필름으로 찍어 보낸 것이다. 들춰보니 간토대지진 때 육군·해군의 자료가 다 있었다. 당시 일본 정부가 어떻게 관여했는지 나와 있었다. 조선대에서 일하던 금병동과 함께 자료를 정리해 미스즈서방에서 <현대사 사료 6집 간토대지진과 조선인>을 냈다. 공개되지 않았던 내용이라 큰 화제가 됐다. 자료 편집을 위해 연구를 해야 하니까 관련 논문을 10편 정도 썼고 중앙공론사의 제의로 75년 책을 냈다.”

-간토대지진의 조선인 학살과 관련해 일본 정부의 관여를 처음으로 주장했는데?

“당시 조선인이 6000명 이상 죽었다. 지진 발생에 따른 혼란 속에 군대와 자경단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이 아니다. 조선인들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본다. 갑오농민전쟁, 의병운동, 3·1운동에 다 연결되는 문제다. 그래서 3·1운동 등 민족운동을 공부해 자료집을 계속 내기로 했는데 시간강사 벌이로 생계 꾸려가기가 어려워 연구와 자료 편찬 다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역사 모르는 동포청년 귀화 많아
남북통일되어야 해결될 문제

-일본 정부는 당시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고 한국 정부도 자료를 요청한 적 없다고 비판해왔는데 변함이 없나?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료집도 그때니까 나왔지, 요즘 분위기 같으면 내고 싶어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나중에 들으니 그 자료집이 한국에서 불법복제돼 대학교에서 세미나 교재로 쓰였다고 하더라. 편자의 이름도 없고. 물론 인세도 받지 못했다.”(웃음)

-북한은 자료를 요구한 적 있나?

“모르겠다. 요즘 북한은 좀 그렇다.”

-한국에는 언제 들어갔나?

“86년 독립기념관 개관과 관련 있다. 당시 국내 학자들이 ‘나쁜 대통령’(전두환)에게 협조하지 않겠다며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내가 자료를 많이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도쿄문화원장 윤탁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국민성금으로 만든 기념관이 문을 열었을 때 일본 정부나 매스컴이 고작 이런 정도의 자료로 비판을 하냐며 험담을 할까봐 걱정됐다. 그래서 독재정권이 하더라도 보는 것은 일반 대중이니 국외 학자들이 협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 들어갔다. 이 문제로 한국을 다녀오니 역시 비난이 있었다.”

-국적은 그때부터 한국이었나?

“몇 번 갔다 오니까 한국으로 바꾸라고 하더라. 갈 때는 정보기관의 허가를 받았고 공항에 도착해서도 그쪽에서 사람이 나왔다. 함양 고향에 갔을 때는 경찰서에서 찾아왔다. 그 시절엔 정보관계 사람들이 너무 설쳤다.”

“일제때 조선인 백화점 혜택”
한국 뉴라이트 막말에 황당

-노년에 들어서는 여운형 연구에 몰입하는 것 같다.

“시간강사를 오래 하느라 한창 정력이 좋은 때를 허송한 것 같아 아쉽다. 그러다 다시 해 보자고 생각해 잡지 <삼천리>에 독립운동가 10명 정도를 연재했다. 그런 단계를 거쳐 여운형 연구로 들어갔다. 내가 보기에 독립운동의 중심은 김구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다. 해방 후 외세의 간여가 없었다면 여운형이 민족의 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동포 청년들은 역사를 잘 모르고 귀화도 많이 한다고 한다. 동포사회의 원로로서 극복 방안이 있나?

“무엇보다 통일이 되어야 한다. 일본도 10여년 전부터 많이 바뀌었다.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교수는 10년 전엔 우파였는데 지금은 중도로 간주된다. 그것을 보면 일본이 얼마나 우경화돼 있는지 알 수 있다. 언제나 젊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인데 나라가 두 개 있으니까 멸시당하고 차별당한 것이다. 국외에서 느끼는 것은 0.5와 0.5가 싸우면 0.25가 된다. 일본에서 납치 가족은 하나의 이권이 돼 버렸다. 북이 나쁘니 일본과 손잡아서 공동대응한다는 생각이 남에 있는데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민족적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좀 차이가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정희의 인기가 압도적으로 높다. 어떻게 보나?

“강제병합 100년을 맞으면서 식민지화와 민족말살(제노사이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간토대지진 때 거리에 비상선을 그어놓고 학살한 것은 오로지 조선인이니까 죽인 것이다. 나중에 황민화정책으로 이어져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 한 것이다. 일본에도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있고 한국에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난리를 치고 있지 않나? 근대화가 좋으니 나쁘니 따지기 전에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제기해야 한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함부로 말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쪽 사람이 최근 일본에 와서 강연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백화점에서 상품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일제 때였다고 말하더라.”

도쿄/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 강덕상 약력

1932년 경남 함양 출생

와세다대 졸

메이지대학원 박사과정

와코대·메이지대·신슈대 강사

히토쓰바시대·시가현립대 교수

재일한인 역사자료관장

저서 <간토대진재>(1975) <조선인 학도 출진>(1997) <조선3·1독립운동-여운형 평전 1>(2002) <상해임시정부-여운형 평전 2>(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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