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농과 함께 임시정부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의친왕 이강.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순종의 아우로, 한때 미국 유학도 했으나 어머니 장 귀인의 가문이 쇠락하면서 내내 불우한 환경에서 지내다 부산에서 쓸쓸히 숨졌다.
김자동-임정의 품 안에서 5
1919년 가을, 할아버지 동농은 망명을 결심한 뒤 의친왕 이강의 동행을 고려한 듯하다. 할아버지와 이강은 자주 만나 망국의 신세타령도 하면서 지내는 가까운 사이였으며, 두 사람은 사돈을 맺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강은 쉽게 망명에 동의했다. 그의 망명은 일제의 거짓 주장에 결정타를 줄 수도 있었으며, 항일투쟁에 큰 경제적 도움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고종은 생전에 상하이의 영국계 후이펑(회풍)은행에 거액의 예금을 했는데, 그 증서를 이강이 갖고 있어 본인이 가면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한 저술 중에는 도산이 이종욱을 파견한 것은 임시정부 쪽의 발상이었으며, 이종욱은 할아버지와 의친왕 이외에 민영달·박영효 등 여러 사람과도 접촉하여 그중 누구든지 망명하도록 설득해 보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이 있다. 그러나 공화체제를 표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제국시대의 고관들을 포섭 대상으로 삼아 사람을 보내는 모험을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더구나 왕조시대의 왕자가 민국정부에 참여하는 데 쉽게 동의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본다. 당시 의친왕이 낭비벽으로 금전적으로 궁핍했다든가, 고종의 예금증서를 갖고 있다든가 하는 사실을 임시정부에서 어떻게 알았을 것인가? 원래 할아버지는 이강과 함께 망명할 것을 구상했던 것인데 잠행 탈출하는 방법을 놓고 약간의 의견차가 있었으며, 시간을 끌다가는 모두 탄로날 것이 걱정되어 할아버지가 먼저 출발하고 뒷일은 전협과 정남용 등이 맡아서 추진하기로 했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망명하자 일제는 조선 내의 저명인사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으므로, 그때 이강이 함께 출발했으면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부러 허름한 옷을 입고 19년 10월10일 안내를 맡은 이종욱과 함께 일산역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 옷은 어머니가 시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지은 것인데, 정작 어미니는 두 분이 떠난 뒤에야 그 용도를 알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11월 초 일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망명길에 오른 이강은 압록강 철교까지 건넜으나 사태를 파악한 일경에게 안동(오늘의 단둥)역에서 내린 직후 체포·연행되었다. 마지막 몇 걸음만 남긴 상태에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할아버지의 망명은 당시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뿐만 아니라 국내, 일본 및 중국의 여러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양반 지배계급은 한일합병을 지지했다는 일제의 주장이 거짓임이 증명된 것이므로 일제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음을 상상할 수 있다. 한편 임정과 국외 각지의 항일세력은 당연히 크게 고무되었다. 당시 임정의 주요 인사가 대부분 60살 미만이었으므로 74살의 대선배를 우선 고문으로 모셨다. 만주에 있는 백야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에서도 할아버지를 고문으로 추대했다. 백야와 할아버지는 같은 안동김씨 문중이었다. 할아버지는 상하이 도착 직후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그곳에서 내외 기자들과 회견하여 망명의 동기를 밝히고 더불어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밝혔다. 상하이 신문들은 이를 크게 보도했으며, 중국 각계에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병원에 찾아온 사람 중에는 탕사오이 전 총리도 있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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